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속도와 경쟁을 바탕으로 한 근대 문명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변화를 안겨주었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면서 거의 모든 일을 손 안에서 처리하고, 4시간 걸리던 서울길은 2시간도 걸리지 않게 되었으며, 국외로의 여행도 거의 내 집 드나들 듯이 한다. 스마트폰이나 편리한 교통은 다양한 소통을 가능하게 했고, 이로써 정보 교환이나 국제적 교류는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목하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맞아 이제 로봇과 사랑을 나누는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격변의 시대를 맞아 인문학문의 길을 다시 생각한다. 인문(人文)의 자의(字意)는 ‘인간의 무늬’이니, 인문학문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을 본령으로 한다. 그동안 인문학문은 인간이 자기 시대를 위하여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거듭해 왔다. 최근에는 대학의 인문학문은 고사하고 사회 단위의 인문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이 과정에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 오히려 대안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나는 일찍이 학문의 방법론을 네 가지로 요약한 바 있다. ‘ㅣ’자형, ‘ㅡ’자형, ‘ㅗ’자형, ‘ㅜ’자형이 그것이다. 전문성을 지향하는 ‘ㅣ’자형은 학문 연구에 구심력이 작용한 것으로서 학문의 깊이를 추구한다. 대중성을 지향하는 ‘ㅡ’자형은 학문 연구에 원심력이 작용한 것으로서 학문의 넓이를 추구한다. ‘ㅣ’자형은 전문성을 확보하고 있지만 학문 내적 고립성을 자초할 수 있고, ‘ㅡ’자형은 대중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얄팍한 교양적 지식을 습득하는 데서 그치고 말 수 있다. 모두가 심각한 단점을 안고 있다.

문제는 깊이와 넓이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ㅣ’자형과 ‘ㅡ’자형의 합체인 ‘ㅗ’자형과 ‘ㅜ’자형이라는 또 다른 방법론을 상정할 수 있다. ‘ㅗ’자형은 먼저 대중적 넓이를 확보한 다음 전공 영역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는 것이고, ‘ㅜ’자형은 먼저 전공 영역을 철저히 한 다음 인접 학문과의 소통을 높은 차원에서 이룩하는 것이다. ‘ㅗ’자형과 ‘ㅜ’자형은 모두가 전문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고려한 것이지만 방향이 서로 다르다. ‘ㅗ’자형이 대중성을 기반으로 한 전문성 강화라면, ‘ㅜ’자형은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대중성 강화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ㅗ’형과 ‘ㅜ’형의 합체인 ‘工’자형이 그것이다. 넓은 교양적 지식 위에 자기 전공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만, 높은 단계의 학제적 소통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유형은 끊임없이 다른 학문과의 소통적 자세를 지닌다. 또한 ‘工’자형은 자형 그 자체가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 즉 아래에서 배워 위로 통하는 학문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아래는 형이하학적인 생활 영역으로 실용을 말하며, 위는 형이상학적인 정신 영역으로 통찰과 깨달음을 의미한다. ‘ㅣ’는 상하의 ‘ㅡ’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성리학의 핵심은 공부론(工夫論)이다. 이것은 오늘날 입시를 위한 암기식 공부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끊임없는 자기 수양을 통해 실천으로 나아가는 참공부를 말한다. 즉, 지(知)공부와 행(行)공부의 거리를 없애 지식은 실천을 통해서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것이다. 공허한 이론 위주의 공부를 철저히 경계하며, 수양과 실천을 통해 성인이 되는 것을 꿈꾼다. 이 때문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은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나니, 공부를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요즘 학교 안팎의 게시판을 둘러보면, 넓고 얕은 공부를 추구하는 정체불명의 ‘ㅡ’자형 강좌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학문은 착근하여 뿌리를 내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강한 휘발성 때문에 곧 사라지고 만다. 전문성이 확보될 때 다른 학문과의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학제적 연대가 자기 전공에 대한 무장해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양 인문학이 살아 있는 학문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ㅗ’자형에서 ‘ㅜ’자형으로, 그리하여 마침내 ‘工’자형에 이를 수 있어야 한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아니 흔들리고, 샘이 깊은 물이 가뭄에 아니 그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뿌리를 더욱 깊게 하고, 샘을 더욱 깊게 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 대학에서 살아나 활학(活學)으로서 세상에 흘러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정우락 교수

(인문대 국어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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