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교 박물관은 1959년 <대학설치기준령>에 의해 설립된 이후 줄곧 학교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현재 본교 박물관은 소장유물 7천여 점, 발굴매장문화재 4만여 점 등의 방대한 유물을 소장 중이다. 이 중에는 *국가지정보물 7점도 있다. 하루 정도는 이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보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는 건 어떨까. 본교 박물관을 찾아가봤다●

*국가지정보물: 유형문화재 가운데 중요한 것을 국가가 정한 것. 문화재청 산하의 문화재 위원회가 심의를 거쳐 지정한다. 

박물관의 터줏대감, 

통일신라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335호)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면 항상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불상이 있다. 바로 통일신라 비로자나불좌상이다. ‘비로자나’는 법신불이라는 뜻으로, 산스크리트어인 바이로자나(Vairocana)를 음역한 것이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비로자나불상이 유행했다. 

당시 비로자나불은 단정하고 경직된 인상이 주를 이뤘지만, 본교 박물관의 비로자나불은 얼굴이 풍만하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것이 특징이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 역시 일반 비로자나불에 비해 크게 표현됐다. 그래선지 박물관을 방문한 사람들이 종종 기도를 하고 가기도 한다. 박물관장 한기문 교수(인문대 사학)는 “오전 일찍 와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다만 기도로 인해 박물관 보존 기능이 손상된다면 제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첨단’기술의 상징, 

대구 무술명 오작비(보물 제516호)

대구 무술명 오작비(보물 제516호)는 저수지를 축조한 기록을 담은 비석이다. 신라시대에 저수지 축조는 ‘첨단’기술에 속했다. 무술명 오작비에 대해 한 관장은 “완경(서라벌)에서 벗어난 지역에 공사한 기록을 공문서로 인증한 셈이다”며 “기록에 나온 578년이면 6세긴데, 그 당시 이러한 문자 기록이 남아있다는 자체가 굉장히 희귀하다”고 말했다. 

현재 무술명 오작비에 새겨진 글자가 선명하지 않아 해석이 바뀔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다. 본교 박물관 이재환 학예사는 “비문에 대한 해석은 계속 바뀌고 있다”며 “10년 전엔 이렇게 생각했는데, 한자가 바뀌면서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행방불명 상반신,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보물 제997호)

반가상은 보통 둥근 의자에 무릎을 하나 들고, 손을 살짝 든 자세로 앉아있다. 오른손은 턱 끝에 대고 있어 깊이 생각하는 모습을 나타냈다고 한다. 본교 박물관 1층 전시실에도 석조반가상이 자리잡고 있다.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보물997호)은 여태까지 발견된 것 중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석조 반가상이다. 1966년 당시 본교 박물관을 주축으로 한 ‘신라오악 조사단’에 의해 발굴됐다. 

그러나 봉화 북지리 반가사유상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상반신이 처참하게 잘려있기 때문이다. 발굴 당시 불상은 상하로 뒤집어져 있는데다, 발 받침대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한 관장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 당시 극단적인 척불론자들에 의해 훼손됐는지, 정확한 훼손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경전으로 명복을 빌다, 백지은니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보물 제 271호)

불교 경전이 필사된 것으로 감지은니수룡엄경이라고 쓰기도 한다. 고려시대에 돌아가신 부모님이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마지은니수릉엄경권제십은 경전 내용은 은으로, 제목은 금으로 씌여졌다. 한 관장은 “고려는 불교국가였기 때문에 경전 필사가 신앙으로 발달된 것이다”며 “마지은니수릉엄경권제십 수준으로 제작하려면 금액도 많이 들고 전문가를 섭외해야 한다”며 “상위 0.5%정도가 할 수 있는 필사였을 것이다”고 말했다.

미처 가져가지 못한 ‘오구라 컬렉션’

승탑은 보통 불교 승려의 사리와 유골을 보관하는 탑이다. 대구 산격동 사자 주악장식 승탑(보물 제258호)은 이름 그대로 석탑 주변에 여러 마리 사자가 새겨져 있다. 한 관장은 “불교에서 ‘사자자리’라고 하면 부처님이 앉는 자리, ‘사자울음’이라고 하면 부처님의 말씀 정도로 여겨졌다”며 “불교 설화나 불경 속 이야기에도 사자가 자주 등장한다”고 했다. 이 탑과 나란히 놓여있는 대구 산격동 연화운룡장식 승탑 역시 정교한 용과 구름이 새겨져 있다. 두 석탑은 팔각형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 팔각형은 ‘고귀한 사람을 모신다’ 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두 승탑에는 승탑의 주인과 건립 연도를 알 수 있는 ‘비’가 없다. 승탑이 원래 있던 위치에서 옮겨졌기 때문이다. 본교 박물관으로 옮겨지기 전 두 탑은 일제강점기 당시 ‘오구라 다스노스케’의 집 앞마당에 있었다. 오구라는 일제강점기 때 대구로 건너와 ‘남선합동전기회사’를 세워 성공한 뒤, 우리나라에 있는 문화재를 헐값에 수집했다. 그는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 문화재를 가지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그의 아들은 1981년 아버지가 가지고 온 유물을 도쿄박물관에 기증했는데, 그 수가 자그마치 1,000점을 넘는다. 

오구라가 두 승탑을 불명의 장소에서 가져온 덕분에 승탑은 원래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한 관장은 “오구라는 문화재를 학자로서 수집한 게 아니기 때문에 승탑과 비의 관계를 몰랐을 것이다”며 “탐욕이 낳은 소산이다”고 말했다. 

이광희 기자/lkh16@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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