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근교 경산시 평산동에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렇다면 가창골, 신동재, 앞산 빨래터는 어떠한가?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 혹은 그 곁에 있는 민간인 학살의 역사는 잊혀지고 있다. 유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서는 안 될 민간인 학살현장을 방문했다●

#코발트 광산으로 가는 길

경산시 평산동 산 40-12번지. 코발트 광산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길찾기’ 어플로는 찾을 수도 없는 곳에 위치해 있다. 코발트 광산은 대중교통을 통해서 갈 수 없으며 차를 타고 간다 하더라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산중에 위치해 있다. 기자는 대구경북전문직단체협의회와 코발트광산유족회 최승호 이사의 동행 하에 현장을 방문했다. 

경산 코발트 광산은 1937년 6월 금·은으로 광업허가를 받았다. 1940년 코발트 검출법이 개발됐고, 이후 1942년 코발트 광맥이 발견돼 1943년부터 채광 선광 제련 시설로 가동이 시작됐다. 최 이사는 “채광 중 코발트 광산에서는 강제 징용도 일어났다”며 “저임금이나 무임금으로 극한의 노동을 요구했다”고 했다. 그 후 코발트 광산은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과 동시에 폐광을 맞았다. 

폐광 5년 후인 1950년 6월 말에서 9월 초까지 코발트광산 지하 갱도와 인근 대원골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국민보도연맹원 및 대구형무소 수감자 약 3,500명이 학살당했다. 최 이사는 “학살 후에도 코발트 광산의 역사는 비극적이었다”며 “1960년대 평산동 사람들은 굴 속에 들어가 금니를 뽑거나, 갱목을 빼내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두개골은 의학용으로 팔리기도 했고 사람뼈를 갈아 먹으면 불치병이 낫는다는 미신에 따라 나환자들이 가져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1970년대는 지하수가 나오는 굴 입구를 막아 모내기 때 쓸 지하수 저장고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1990년대 말까지는 굴 입구에 천막을 쳐서 얼음굴 식당이라 칭하고 닭백숙을 판매하기도 했다.

코발트 광산에 도착하니 ‘인터불고 골프장’의 표지판이 보였다. 최승호 씨는 “코발트 광산 뒤편에 넓게 골프장이 자리하고 있다”며 “골프장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코발트 광산과는 달리 호황을 이룬다”고 했다.

#풀이 무성한 추모비

코발트 광산의 희생자 대부분은 경산청도 국민보도연맹원 1,000명과 대구 형무소 수감자 2,500명 등 총 3,500명으로 추정되며 학살 주체는 군과 경찰이라고 알려져 있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6월 결성된 단체로 좌익 전향자를 계몽, 지도하기 위해 만든 관변 단체이다. 국민보도연맹의 조직 확대는 전쟁 전까지 계속돼 한국전쟁 직전 약 33만 명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으리라 추측된다. 사상과 상관없이 식량을 배급해 준다는 이유만으로 가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최 이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경은 지역 보도연맹과 형무소 수감자들이 인민군을 도울 것이라는 명분 하에 학살을 자행했다”며 “당시 주민들은 ‘하루에 군용트럭 10여 대씩 한 달간 사람들이 계속 실려 왔으며 트럭이 지나가고 몇 시간 후에는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평산동 쪽에서 들려왔다’고 증언했다”며 진지한 자세로 설명을 이어갔다. 

코발트 광산에 도착하자 포도밭 옆에 자리한 추모비가 보였다. 추모비의 규모는 작았고 반달 모양으로 파인 부분은 희생자의 ‘눈물’, 학살 당시 사용됐던 ‘총알’, 파져있는 ‘굴’을 의미한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듯 주위로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최 이사는 “시에서 1년에 두 번쯤 풀을 베어주는 것이 전부이며,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풀도 금방 난다”며 “유족회에서 관리를 하려 해도 유족 대부분이 나이가 많고 생업이 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관리를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함께 동행한 A 씨는 “추모를 하기 위해 만들어 둔 장소에 그 누구도 추모를 하러 오지 않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추모비는 2007년 역사체험현장 관광 사업의 예산으로 받은 10억 원으로 2016년에 건립됐다. 추모비가 건립된 후 매년 음력 9월 9일에 위령제가 열린다. 위령제에서는 종교 의례, 추도사, 유족들이 정부에 바라는 요구 사항 등을 발표한다. 

#코발트 광산에 들어가는 길

광산의 입구는 자물쇠로 굳게 잠긴 채 철창과 철문, 이중으로 막혀 있었다. 녹이 슨 문은 여러 번 밀고 당겨야만 열렸다. 코발트 광산에 동행한 B 씨가 문을 여러 겹으로 꽁꽁 잠궈둔 이유를 묻자, 최 이사는 “인터넷에 ‘코발트 광산’을 검색해보면 민간인 학살지보다 공포 체험 장소라고 먼저 뜬다”며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공포 체험을 온 사람들이 학살 현장을 훼손하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렇게 열리지 않는 문을 여러번 밀고 당기고 나서야 광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광산 안으로

광산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불어나왔다. 여름에도 평균 14도 정도를 유지한다는 광산 내부의 한 쪽에는 안전모들이 구비돼 있었다. 안전모를 착용하고 광산에 들어섰다. 천장은 매우 낮았고, 키가 160cm인 기자도 허리를 깊이 숙여야 광산 내부를 지나갈 수 있었다. 광산 안은 어두울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전구가 환히 밝혀져 있었다. 

광산은 철도에 나무 판자를 올려놓아 길을 만들어 둔 상태였다. 나무 판자는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삐걱거렸다. 최 이사는 “발굴 당시 설치한 철도이고, 나무 판자는 나무가 삭아서 새로운 걸로 계속 교체를 하지만 삐걱거릴 수도 있으니 주의하라”고 했다. 최 이사는 “나무 판자가 없는 곳은 밟지 말아달라”며 “아직 수습되지 않은 유해들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나무 판자가 없는 곳은 물이 흥건한 진흙 바닥이었다. 유해를 밟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갖 신경이 곤두섰다. 

최 이사는 거기부터 수평 2굴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나무 위에 하얗게 있는 것들이 곰팡이고, 굴 안 곳곳에 나방과 박쥐가 서식하기 시작했다”며 “사람이 드나들고 난 이후 굴 내 온도가 상승해 이러한 변화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 후로부터 양쪽에는 길게 들어선 흙 포대들이 있었다. 그 흙포대 안에는 발굴 당시 함께 쏟아져 나온 흙이 담겨 있었다. 그는 “흙을 버리지 않고 포대에 보관하는 이유는 흙에 작은 조각의 유해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라며 “나중에 다시 유해 발굴이 시작되면 흙부터 채로 유해가 있는지 다 걸러봐야 한다”고 했다. 바닥에는 휴지를 물에 푼 듯한 뿌연 것들이 흘려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보이는 뿌연 것들은 시신이 덜 썩어서 계속 살점이 녹으며 묻어져 나오는 것이다”고 했다.

흙 포대가 줄 지은 레일 길을 넘어서까지 계속 걸어 들어가자, 더 이상 굴을 밝히는 전등도 없었다. 그 뒤로는 휴대폰 불빛을 켜고 따라 들어갔다. 그곳부터는 머리 위로 끝이 보이지 않는 천장이 들어섰다. 바로 수직 1굴이였다. 그보다 더 안쪽으로는 끝도 보이지 않는 호수가 있다고 했다. 

#유해를 보관 중인 컨테이너 박스

컨테이너 박스에 있는 창문은 누군가 돌로 깬 듯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최 이사는 “이걸 또 누가 이렇게 해놨네…”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누구의 소행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종종 이런 일이 발생한다”며 “몇 번이나 지방자체단체에 CCTV를 설치해달라고 했지만 묵묵부답이었고,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하지만 그럴 때마다 유족회가 보초를 설 수는 없지 않느냐“고 했다.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자 충격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유해들은 어떠한 보존 장비 없이 플라스틱 박스 안에 분류돼 담겨 있었다. 유해를 누가, 언제 훔쳐가도 모를 만한 환경이었다. 그는 “컨테이너 속에 유해를 보존한다는 게 사실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온도 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는 컨테이너 안에 보관 되는 유해들은 해가 지날 때마다 얼고 녹고를 반복하며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했다. 

컨테이너에 보관돼 있지 않은 다른 유해는 현재 충북대에 보관돼 있다. 그러나 보관 기한인 2016년 6월이 지나 현재 유해를 옮겨야하는 상황이다. 이에 최 이사는 “코발트 광산 민간인 학살이라는 사건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연속이기 때문에 유해를 화장하거나 묻을 수 없다”고 했다.

코발트 광산의 첫 진상 규명은 학살이 일어나고 10년 뒤인 1960년, 4·19혁명을 거치며  유족들의 진상조사 요구로 이뤄졌다. 그때 결성된 경북유족회가 당해 8월 코발트 현장 조사를 진행하고 유해를 수습했으리라 추정된다. 하지만 그때 수습된 유해들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라져 추적이 불가해졌다. 이후 정권의 압박 때문에 유족들은 어떠한 요구도,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후 총 6번의 발굴 조사가 추가로 이뤄졌는데, 1차 발굴은 2001년 3월 유족회와 MBC의 3일 간 수평 2굴에 진행한 것이었다. 제2차 발굴때는 2003년 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 주관으로 대원골을 발굴했다. 전문가의 도움은 없었다. 최 이사는 “유해 발굴이라기보다는 갱도 이외 지역에서도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음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대원골에서도 작은 규모였지만 유해가 발견됐다. 3차 발굴은 동굴탐사 전문가인 석동일 씨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광산이 거대한 자연 동굴이라는 새로운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동굴의 음산한 분위기 때문에 석동일 씨가 끝까지 동굴 조사에 함께하지 못했고, 수직 2굴에 대한 발굴은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제4차, 5차, 6차 발굴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하게 되면서 이뤄졌다. 

#앞으로 나가야할 방향 

지난 노무현 정부 때 이뤄졌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을 통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해 민간인 학살 조사와 몇 차례의 유해 발굴이 이뤄졌다. 그러나 두 정권이 교체되는 동안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사라졌다. 대구경북에서는 경산 코발트 광산뿐만 아니라 가창골에서도 학살이 자행됐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등에 연루된 사상범과 단순절도범들이 7월7일부터 31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군과 경찰에 의해 1만 명 정도 학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2002년 민주당 전갑길 의원의 조사에 따르면 2,500여 명의 대구형무소 수감자들이 학살당했고 4,000~6,000여 명의 민간인도 함께 희생당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10월 항쟁 유족회(가창골 유족회 포함) 채영희 회장은 “정권에 따라 과거사에 관련된 법안이 통과되기도 하고 통과되지 않기도 하는 현실이 말도 안 된다”며 “하루 빨리 법적으로 민간인 학살 조사와 발굴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올해 3월 이개호 의원 포함 11명 의원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등 과거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기본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최 이사는 “민간인 학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유해를 수습하는 일은 유족회만의 일이 아닌 이 땅에 남겨진 모든 사람들의 몫이다”라며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잘못한 역사를 바로잡아야 다음 세대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10월 항쟁유족회 채영희 회장 역시 “국가에서 자

행한 만행을 늦었지만 인정하고 사죄해야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며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했다.

류승혜 기자/ysh17@knu.ac.kr

사진: 이한솔 기자/lsh15@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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