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유변, 기자에게도 할 말이 있다. 지난 1년 동안 기자유변 고정란을 통해 칼럼을 써 봤지만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글을 하나 딱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만큼 내가 쓴 글에 스스로 애정을 갖고 있지 않아서일까? 나는 내 글들을 사랑하기는 하는데…. 아마도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털어놓은 적이 없어서일지 모르겠다.

나는 늘 말이 많았다. 어렸을 때에도 말이 많았고, 비교적 낯을 가리고 무뚝뚝해진다는 사춘기 때에도 여전히 말이 많았으며, 성인이 된 후 대학에 들어와서도 말이 많았다. 그러나 경북대신문에 들어와서 학우들에게 그 말을 글로써 전달하려 하니 걸리는 게 많았다. 언론에도 윤리와 규칙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속에 한가득 쌓여 메아리치고 있는데, 쓸 수 있는 말에는 한계가 있었다. 모든 학보사 기자들, 나아가 일간지 기자들도 고민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기사로 얼마나, 어떻게, 어디까지 표현하는가의 문제, 경북대신문과 함께한지 이제 2년이 다 돼가지만, 말을 글로 옮기는 것은 아직까지도 어렵게 느껴진다. 사람들을 만나 취재를 할 때에도 그렇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혀끝까지 차오르는 말들을 꾸역꾸역 삼켜야 할 때가 많다. 교수님! 왜 당신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처럼 말씀하세요? 교수님도 책임자예요! 아, 거기 당신, 당신은 왜 학생 대표자 선거에 참여하지 않습니까? 투표하지 않는 자에게는 대표자를 욕할 권리도 없다는 것 모르나요? 거기 당신도요. 대표자가 되고 싶다고요? 그럼 신뢰를 받을 수 있게 행동해야죠…. 세상에, 저기, 교수님. 당신을 향한 비판이 전부 다 ‘악플’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나의 말들이 속으로만 쌓이는 이유는 어떠한 외압 때문이 아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예의와 언론인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 크게 잘나지도 않은 주제에 엘리트주의에 빠져 함부로 삿대질을 하지 않기 위한 자기검열 등이 뒤엉켜 ‘말의 필터’를 만들어냈다. 여태까지는 그 ‘필터링’에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아왔는데, 최근에는 조금씩 회의감이 든다. 나는 어디까지 말해야 하고 또 어디부터 입을 다물어야 하는가. 그 전에, 나는 어디까지 말하고 싶은 건가. 내가 여태까지 기사를 써온 것은 무엇을 위함인가.

기자유변, 모든 기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무수한 고민을 하며 기사를 작성한다. ‘기레기’라는 욕을 먹거나 “그게 신문이냐”고 하는 상처 되는 비난을 받을 때도 있지만, 우리는 늘 스스로의 말을 고민하고 그를 바탕으로 쓴 우리의 글을 또 고민한다. 내년의 조현영 기자는 스스로의 말을 어디까지 표현하고, 어떤 기사를 작성하게 될까? 지금 이 순간보다 더 나은 기자가 될 수 있을까?

오호통재, 기자유변이다. 말 많은 기자는 불행하다. 나는 어제도 할 말이 많았고, 오늘도 할 말이 많으며, 내일도 할 말이 많을 예정인데 말이다.

조현영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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