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5월 20일부터 질량의 단위인 킬로그램(kg)을 포함한 4개의 기본단위가 재정의된다. 이번 재정의에서는 ‘킬로그램 원기’라는 물질을 질량 단위로 사용했던 기존 정의를 폐지하고,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물리상수 ‘플랑크상수’를 활용한다. 킬로그램을 비롯한 단위는 어떤 역사를 거쳐 지금까지 오게 됐을까?●

고대·중세의 단위

고대부터 ‘단위’는 매우 중요했다. 각 농가마다 공물을 일정하게 걷기 위해서 곡물의 부피 단위가 필요했고, 황금을 매매할 때에는 무게 단위가 필요했으며, 약속을 잡기 위해서는 시간 단위가 필요했다. 그래서 고대 사람들은 신체의 일부를 길이 단위로 사용했고, 저울을 통해 질량을 측정했으며, 해의 위치를 통해 시간을 측정했다. 그 예로 고대 중국에서는 발 길이를 ‘척’이라 부르며 길이 단위로 사용했고, 12세기 무렵 영국의 왕 헨리 1세는 자신의 팔 길이를 기준으로 한 ‘야드’를 도량형에 도입했다.하지만 각 지역별로 단위의 기준이 너무나 다양했고, 각 기준들이 불확실한 탓에 실험을 할 때마다 다르게 측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5세기 경 유럽에서는 정복전쟁이 지속되면서 도량형이 섞여 엉망이 되기도 했다. 무수히 많은 단위들이 변경되거나 제거됐고, 측정 대상에 따라 단위의 크기와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도량형이 섞이다 보니 일부 관리들이 이를 악용해 공물을 더 많이 징수하는 폐단이 있었으며, 과학 발전에도 제동이 걸렸다. 이에 많은 학자들과 통치자들이 도량형을 통일하고자 노력했지만, 근대에 접어들기까지 큰 진척을 보이지는 못했다.

프랑스 혁명과 미터법의 탄생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단위 통일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1790년 국민들의 도량형 탄원서를 읽은 프랑스의 정치인 탈레랑이 “도량형의 난맥상은 정신을 혼란시키며 상거래를 저해한다”는 내용의 도량형 개혁안을 국민의회에 제출했다. 이후 파리 자오선의 1,000만분의 1을 기본 길이 단위로 정하고 ‘척도’를 뜻하는 그리스어 ‘메트론(metron)’에서 유래한 ‘미터(meter, m)’를 기본 길이 단위 명칭으로 정했다. 또한 모서리의 길이가 10cm인 정육면체의 부피(1,000㎤)를 부피 단위로 정하고 명칭을 ‘리터(leter, l)’로 정했으며, 물 1리터의 질량을 질량 단위로 정하고 명칭을 ‘킬로그램(kilogram, kg)’으로 정했다. 이 세 가지 단위를 십진법적 도량형 단위법으로 정한 것이 ‘미터법’이다.미터법은 매우 혁신적 발명이었다. 탈레랑의 도량형 개혁안 내용에서 볼 수 있듯 당시 프랑스는 지역마다 단위가 달라 거래가 매우 불편했다. 이때 미터법은 상거래와 세금 징수에 공정성을 불어넣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떠올랐다. 또한 근대화와 함께 같은 제품을 무수히 만들어내는 공정이 도입되며 단위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됐다. 그리고 추상적이고 정성적인, 인간의 경험에 의존했던 과학 역시 정량적 실험을 토대로 정확함을 추구해 미터법 이전보다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이미 다른 단위를 쓰는 지역 및 국가에 미터법을 보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미터법을 처음 제정한 프랑스도 미터법이 완전히 보급되기까지 4~50년 이상이 걸렸다.이후 도량형의 통일을 필요로 하는 국가는 점점 늘었고, 미터법의 보급과 세계화는 점점 진척이 이뤄졌다. 1875년 5월 20일에는 미국을 비롯한 17개국이 길이와 질량의 표준을 미터와 킬로그램으로 정하는 미터협약을 체결했다. 미터협약 회원국들은 4~6년마다 ‘국제도량형총회’를 열어 도량형의 발전과 개선에 대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모든 국제표준단위들은 국제도량형총회를 통해 변경·정립되며, 매년 5월 20일을 세계 측정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물질 표준에서 자연 표준으로

1799년 미터원기와 킬로그램원기가 등장했고, 이후 미터와 킬로그램의 정의는 각각 원기의 길이와 질량이 됐다. ‘원기’라는 물질을 단위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원기는 주위 환경에 의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물질이 들어가거나 부식되는 등 질량 및 길이 변동의 요인도 많았다. 이러한 기준의 오차는 현대에 들어서며 점점 크게 다가왔다. 당장 수억 미터를 넘나드는 우주산업이나 수백만 분의 일 미터 단위의 첨단산업에서는 아주 작은 오차에도 완전히 다른 결과가 초래되기 때문이다. 측정학자들은 더 이상 물질이 단위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변하지 않는 법칙을 통해 단위를 정의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1960년 10월 14일 제11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국제단위계(International System of Units, SI)’가 만들어졌다. 국제단위계는 기본단위와 유도단위로 구분되며, 기본단위는 현재 ▲길이(미터, m) ▲질량(킬로그램, kg) ▲열역학적 온도(켈빈, K) ▲시간(초, s) ▲전류(암페어, A) ▲물질량(몰, mol) ▲광도(칸델라, cd) 등 총 7가지로 구성돼 있다. 유도단위는 기본단위를 통해 유도할 수 있는 단위들이며 ▲넓이(㎡) ▲속도(m/s) ▲밀도(kg/㎥) 등이 있다.또한 측정의 정밀도를 높이기 위해 절대 변하지 않는 자연 표준을 채택했다. 제11차 총회에서는 특정 조건에서 원자가 방출하는 빛은 일정하다는 사실을 토대로 미터를 ‘진공에서 크립톤-86 원자가 특정 조건에서 방출하는 빛 파장 길이의 1,650,763.73배’로 재정의했다. 이는 국제단위의 기준을 자연현상으로 설정한 최초의 사건이며, 이후 기존의 미터원기는 박물관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1983년 제16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는 빛의 속도가 불변한다는 사실에 착안해 미터를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로 다시 재정의했다.

*물리상수: 물리현상을 정량적으로 다루기 위해 사용하는 변하지 않는 값*도량형(度量衡): 길이, 부피, 무게 등을 재는 방법 및 그것을 재는 기구*원기(原器): 도량형을 측정하는 여러 단위들(미터, 리터, 킬로그램 등)의 기준이 되는 기구*자오선(子午線):북극점과 남극점을 최단 거리로 연결하는 지구 표면상의 세로선. 경선이라고도 부른다.*정성적(定性的): 물질의 성분이나 성질을 밝히는 것*정량적(定量的): 물질의 양을 헤아리는 것*기본단위: 물리적 양을 표시할 때의 기본이 되는 단위*물질량(物質量): 원자나 분자 등의 물질의 양에 대한 기본단위*광도(光度): 빛의 밝기를 나타내는 값에 대한 기본단위*파장(波長): 파동의 한 주기가 가지는 거리. 빛도 파동의 성질을 가지므로 파장이 존재한다.

물리상수 표준의 도래

측정의 정밀도는 현재에 오기까지 끊임없는 논의를 거쳐왔다. 특히 물리적 원리 및 상수를 바탕으로 정의된 다른 6개 단위와 달리 질량 단위는 여전히 원기를 사용하고 있다. 즉 1889년에 만들어진 국제킬로그램 원기를 1901년 제3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질량의 기준으로 선포한 후 100년이 넘은 현재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2007년 제23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기존에 정의된 다른 단위를 재정의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2011년 제24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질량, 물질량, 온도, 전류를 재정의하기로 결정했다. 이 4가지 단위들은 올해까지 물리학적 실험을 통해 정밀하게 정의한 후 내년 5월 20일 세계 측정의 날부터 공식적으로 적용된다.질량의 단위인 킬로그램(kg)은 ‘플랑크상수’를 통해 정의된다. 플랑크상수는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가 발견한 물리상수다. 고전물리에서는 빛의 에너지와 파장이 반비례하며 파장이 무한대가 될수록 에너지는 ‘0’에 가까워진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플랑크는 실험을 통해 에너지에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단위가 존재하며, 에너지의 값은 이 최소 단위의 정수배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최소 단위는 이후 플랑크상수로 명명됐다.따라서 플랑크상수는 에너지로 표현할 수 있으며, 에너지는 다시 역학적 에너지와 전자기적 에너지의 두 성질로 표현할 수 있다. 역학적 에너지는 질량과 중력에 영향을 받으며 전자기적 에너지는 전류와 전압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플랑크상수는 질량·전류·전압 등의 수치로 나타낼 수 있다. 이 원리에서 착안한 질량측정기구가 ‘키블저울(kibble balance)’이다. 키블저울의 한 쪽에 어떤 물체를 달면 그 질량과 중력에 의해 역학적 에너지가 발생하는 기구다. 또 다른 쪽에는 물체가 아닌 도선이 설치돼 있으며, 여기에 일정한 전류를 흘려보내면 전자기적 에너지가 발생한다. 이렇게 생성된 역학적 에너지와 전자기적 에너지가 같아야 키블저울이 평형을 이룬다. 즉 전류를 조절하면 질량도 조절할 수 있고, 이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면 정밀한 플랑크상수와 킬로그램의 측정도 가능한 것이다.이러한 방식을 통해 세계에서는 최근까지 플랑크상수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실험이 진행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가 키블저울 및 여러 가지 실험 장치를 통해 플랑크상수 및 킬로그램 측정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KRISS 역학표준센터 이광철 박사는 “작년 7월 1일까지 각 나라에서 발표한 실험결과를 토대로 내년부터 사용할 플랑크상수 값을 고정했다”며 “현재는 질량 정의를 위한 키블저울 정밀도 향상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물질의 양을 표현하는 단위인 몰(mol)도 재정의된다. 기존 몰의 정의는 ‘탄소-12의 12g에 있는 원자의 개수’다. 이때 1몰에 들어있는 원자의 개수를 ‘아보가드로 수’라는 물리상수로 표현하며, 그 수치는 대략 이다. 아보가드로 수는 다른 물리상수들에 비해 비교적 쉽게 계산할 수 있다. 어떤 물질의 질량을 측정한 후, 그 물질의 원자량을 통해 원자 개수를 세면 그 수치가 곧 아보가드로 수다. 앞서 질량이 재정의됐으므로 아보가드로 수 또한 정밀한 측정을 통해 재정의되는 것이다.1948년 제9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전류의 단위 암페어(A)를 ‘무한히 길고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작은 원형 단면적을 가진 두 개의 평행한 직선 도체가 진공 중에서 1m 간격으로 유지될 때 두 도체 사이에 1m당 N의 힘이 생기게 하는 일정한 전류’로 정의했다. 하지만 ‘무한히 길고’, ‘무시할 만큼 작은’이라는 표현이 애매하기 때문에 이번 국제도량형총회에서는 암페어 역시 물리상수로 정의하기로 했다. 새로운 정의에는 전자 1개가 갖는 기본 전하량 ‘e’를 사용한다. 하지만 전류의 정의에는 다른 기본단위의 정의에 비해 걸림돌이 많다. 전류를 정의하고 측정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본 전하량 정도의 매우 작은 전류를 발생시키는 전류표준소자가 필요한데, 이를 직접 만드는 것이 현재로서는 어렵기 때문이다. 기본 전하량 e가 고정되었으므로 전류표준소자 연구는 지금까지 진행 중이며, 올해 여름 정확한 전류의 정의를 결정할 예정이다.마지막으로 열역학적 온도 단위 켈빈(K)의 기존 정의는 ‘물의 삼중점의 열역학적 온도의 1/273.16’이다. 물의 삼중점은 물의 온도와 압력을 적절히 바꿔 기체·액체·고체가 모두 존재하는 상태일 때의 온도 및 압력을 의미한다. 하지만 물은 온도와 압력 외에도 동위원소 등 다른 요인에 의한 영향을 받아 삼중점이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새로 정의된 열역학적 온도 단위 켈빈은 ‘볼츠만상수’를 이용한다.볼츠만상수는 이상기체를 압력과 부피, 온도의 함수로 다룰 때 사용하는 물리상수다. 이상기체의 압력을 P, 부피를 V, 총분자수를 N, 열역학적 온도를 T로 치환할 때, P×V와 N×T는 비례한다. 이 현상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볼츠만상수 k를 사용하면 PV=kNT라는 식이 성립한다. 따라서 열역학적 온도는 볼츠만상수 및 압력·부피·총분자수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 4가지 값을 정밀하게 측정하면 열역학적 온도의 정밀한 값을 도출할 수 있다. 압력·부피·총분자수는 현재 기술로 충분히 정밀한 측정이 가능하고, 볼츠만상수 역시 최근까지 연구가 진행되어 고정값을 정해 내년 재정의에 적용할 예정이다.환경적 요인에 의존하는 물질 및 자연 현상과 달리 물리상수는 어떤 환경에서도 일정하다. 그래서 물리상수를 표준단위의 정의 방법으로 채택한 것은 측정 역사의 큰 혁신이다. 하지만 아직 남은 연구과제는 많다. 이 박사는 “아직 표준측정기술과 측정 장치를 개발해야 하기 때문에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이라며 “당장 표준단위가 재정의되는 것에 치중하기보다는 KRISS의 표준기술이 최고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흑체복사(黑體輻射): 주어진 온도에서 어떤 물체가 방출할 수 있는 에너지의 이론적인 최댓값*원자량(原子量): 원자의 평균 질량을 일정 기준에 따라 정한 비율*열역학적 온도(熱力學的 溫度): 물질에 관계없이 분자의 운동이 0이 되는 온도를 0K로 하는 온도 단위. 온도 간격은 섭씨온도와 같으며, 절대온도라고도 부른다.*동위원소(同位元素): 원자번호는 같지만 질량이 다른 원소*소자(素子): 장치, 전자 회로 따위의 구성 요소가 되는 낱낱의 부품*이상기체(理想氣體): 구성분자들이 모두 동일하며 분자의 부피가 0이고, 분자간 상호작용이 없는 가상적인 기체

유동현 기자 / ydh17@knu.ac.kr

자문:이광철 박사(KRISS 역학표준센터 책임연구원)문창성 교수(자연대 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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