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교가 72번째 봄을 맞이했다. 계절이 72번 돌아오는 동안 본교에관한 여러 기록이나 자료들을 수집하고 보관한 곳이 있다. 바로 본교 대학기록관이다.이곳에서 전시하거나 보관 중인 ▲전신학교 ▲6·25전쟁 ▲인혁당 사건▲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등에 관련된 자료와 함께,본교가 거쳐 온 주요 시기와 사건-그때 그 시절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김민호 기자/kmh16@knu.ac.kr편집 이홍은 기자/lhe16@knu.ac.kr

본교의 전신 학교들

위 사진은 본교 사범대학의 전신인 대구사범학교의 수학여행 안내서이다. 1937년과 1938년 사이에 이뤄진 수학여행으로, 여행지는 만주지역이었다. 안내서 속에는 일정과 만주지역까지 가는 경로, 만주지역 지형지물의 모습 등이 담겨있다. 본교가 종합 국립대학교로 출범한 해는 1952년이고 그해 개교식을 열었던 5월 28일을 개교기념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본교의 개교원년은 본교의 전신학교들이라고 볼 수 있는 ▲대구사범대학 ▲대구의과대학 ▲대구농과대학이 국립대학으로 승격된 1946년으로 삼는다. 광복 직후에 국립대학 승격·개편이 이뤄진 것은 해방 이후의 시급한 인재양성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대구사범대학의 전신은 경상북도 공립사범학교로 경상북도가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사범학교 규정에 의거하여 1923년 4월 1일에 설치했다. 이는 우리나라 두 번째로 설치된 사범학교였다. 직접적인 시작은 일제강점기 때 전문학교령에 의하여 전문학교 과정인 3년제 본과 설치부터라고 볼 수 있다. 해방 후 1946년 4년제 대학으로 개편되면서 국립 대구사범대학으로 개편됐다. 1948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고 1951년 10월 6일에 국립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으로 편입됐다. 대구사범대학은 본교 사범대학으로 개편되기 전까지 초등교사 약 7천명, 중등교사 약 5백명을 양성했다. 1944년 4월 30일 대구농과대학의 전신인 대구농업전문학교가 개교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세계 2차 대전 막바지였기 때문에 교사가 신축되지 못했고 대구농림학교의 교실을 빌려 썼다. 1946년 9월 국립대학 설치령에 의해 4년제인 국립 대구농과대학으로 개편됐다. 본관이 없었던 대구농과대학은 1949년 5월에 대구시 하동에 위치한 실습농장에 본관과 부속건물을 준공하여 그곳에서 처음으로 졸업식을 가졌다. 대구사범대학과 마찬가지로 1951년 10월 6일 국립 경북대학교 농과대학으로 개편됐다. 대구의과대학의 전신은 1932년 개교한 사립 대구의학강습소에 기원한다. 대구의학강습소는 1933년 일제 칙령에 의하여 대구의학전문학교로 인가됐다. 이는 대구지역 의료인 양성을 위해 일제가 대구 최초로 설립한 의학전문학교였다. 그 해 11월 현 동인동캠퍼스 위치에 교지를 구입하고 건축물을 지었다. 의과대학 본관은 현재까지 남아있어 사적 제442호로 등록되어 있다. 해방된 해인 1945년 미군정청 학무국 방침에 따라 대구의과대학으로 승격됐다. 1946년 콜레라 창궐 때 대구의과대학 의대생들이 활약하는 등 지역 의과대학으로써의 역할을 했다. 위 두 대학과 마찬가지로 1951년에 국립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통합됐다.

▲대구사범학교 수학여행 안내서 (1937-38)

본교의 전란 시기

위 자료는 6·25 전쟁 중이었던 1953년, 본교 문리과대학 졸업생인 손원학 동문이 학도호국단 간부회의 참석을 위해 발급받았던 여행증명서다. 지역을 오가기 위해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했던 전쟁 당시의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전쟁 때 대학생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자료는 ‘전시학생증’이다. 본교 대학기록관은 1952년과 1953년 본교 학생들에게 발행된 전시학생증을 보관하고 있다. 1952년 9월부터 시행된 전시학생증제도는 당시 대학생들에게 재학 중 징집보류 혜택을 주기 위해 시행됐던 제도다. 이 제도의 도입 이후 전국의 대학과 대학생 수가 크게 늘기도 했다. 본교의 대학기록관에서는 전쟁의 참상도 찾아볼 수 있다. 대학기록관에는 대구의과대학이 1951년 작성한 ‘동란피해관계철’이 전시돼 있다. 전쟁이 발발한 1950년 이후의 학생, 건물 등의 피해상황을 정리한 자료다. 대구의과대학은 전쟁이 일어난 1950년 수업을 일시 중단했고, 같은 해 7월에는 UN군의 주둔으로 교사를 군에 양도했으며 부속병원도 육군병원으로 사용토록 했다. 동란 이후에는 세균조작의 실기강의, 의화학, 약리학 및 생리학 실습에 썼던 실습기기와 시설이 거의 없어져 버렸다. 대구농과대학의 경우도 교사가 육군에 의해 징발돼 이동 강의를 하던 시절이 있었고, 대구사범대학도 미군의 교사 사용으로 떠나있어야 할 때가 있었다. 본교는 전시연합대학에 참여하기도 했다. 전시연합대학은 문교부령 제19호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조치령’에 따라 한국전쟁 중인 1951년 2월 설립된 종합대학 성격의 전시 대학연합체로, 부산을 중심으로 광주·대전·전주 등지에서 운영됐다. 대구의과대학의 경우에는 부산전시연합의과대학에 소속된 5개 대학 중 하나였다.이처럼 6·25 전쟁은 본교에 많은 피해를 주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종합 경북대학교를 탄생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대구 지역민들은 해방 직후부터 종합대학교 설립을 추진해왔다. 1945년 종합대학교 기성회가 조직됐고 이듬해 11월에는 문교부에 종합대학교 설립인가 신청을 제출했다. 그러나 1947년 3월 7일 문교부가 유지재원 부족을 이유로 신청서를 반려하면서 설립에 실패했다. 이러한 문교부의 결정은 1946년 국대안(국립대학개혁안) 반대운동이 격렬히 일어난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미군정이 국립서울대학을 설립하고 미국인 총장을 임명하려하자, 서울대학교 단과대학 구성원들이 식민지교육 반대·학원의 자유와 민주화를 주장하며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지역 종합대학교 설립에 대한 분위기가 바뀌게 된다. 전쟁 당시에는 전국 대학의 60%가 서울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이에 전쟁으로 서울 지역 대학의 피해가 집중적으로 발생하자 대학을 전국적으로 분포시켜야 한다는 ‘전국 1도 1국립대학’ 안이 힘을 얻게 됐다. 1951년 4월에는 본교 전신 3개교 학장과 도지사 등이 위원으로 있는 ‘국립대학교 건설을 위한 위원회’가 결성됐고, 결국 당해 10월 6일 국립 경북대학교 설립인가가 대통령의 제가를 받았다. 1952년 전시연합대학 체제가 해산되면서 지역 종합국립대학교의 개교가 연이어 이뤄졌다. 본교도 1952년 5월 28일 단오절을 기하여 종합 경북대학교의 개교식을 치루게 된다.

▲6·25전쟁 당시 여행증명서 (1953)

본교 민주화운동의 큰상처, 인혁당 사건

위 자료는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 조작사건 진상규명집이다. 1~3집으로 이뤄져 있고 6월 항쟁 직후인 1987년 10월에 작성됐다. 이 자료는 인혁당 조작사건 진실규명회가 발간한 것으로 2차 인혁당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은 본교 졸업생 임구호(자연대 물리 67) 씨가 기증한 자료다. 여전히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은폐됐던 당시, 피해자들의 무고함을 주장하기 위한 자료를 모은 것이다. 자료집 안에는 유족들과 지인들이 피해자 한 명 한 명의 신원을 알리고, 피해사실과 판결 당시 선고 이유를 적으면서 이에 대한 반증을 담아 판결에 대한 반박을 이어나간 내용이 담겨있다. 위 자료의 배경이 되는 사건은 2차 인혁당 사건이다. 박정희 정권은 1969년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안인 ‘3선개헌안’을 통과시켰고, 1972년에는 영구 집권 내용을 포함한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이에 전국적으로 유신반대운동이 일어나게 됐다. 이를 위험하다고 판단한 박정희 정권은 마침내 대통령긴급조치를 선포하고 유신반대운동 등의 행위를 금지했으며, 이를 어긴 자들을 비상군법회의에서 처단할 것을 선포했다. 그런 상황에서 1974년 4월 3일 대통령긴급조치 제4호가 선포된다.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를 처벌하기 위한 것으로 “이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고 규정됐다. 하지만 추후 민청학련 사건은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정권은 학생들의 봉기계획을 미리 파악해 체포했고 이들이 민청학련 조직원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민청학련 배후에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한 지하조직이 있으며 그것이 인혁당이라고 주장했다. 인혁당은 1964년 박정희 정권이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이라고 조작한, 존재하지도 않는 단체이다. 1974년 1월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에 의해 설치된 비상보통군법회의는 1974년 7월 본교 사회대 정치외교학과 학생이었던 여정남 열사를 포함한 8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항소를 제기했으나 모두 기각됐고 결국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이 확정됐다. 판결 후 겨우 20시간이 지난 4월 9일, 사형선고를 받은 8인에 대한 형이 집행됐다. 국제법학자협회가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는 등, 이 사건은 유신체제하의 대표적인 인권침해사건으로 기억됐다.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 사건이라고 발표했고, 국정원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도 2005년 12월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고문과 ‘인민혁명당’ 구성 및 가입 등에 대한 조작 사실을 인정했다. 마침내 2007년 1월 23일 서울 중앙지법은 여정남 열사를 포함한 ‘인혁당재건위사건’ 희생자 8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인민혁명당 조작사건 진상규명집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지난 2003년 세계 대학생들의 스포츠 축제인 유니버시아드 대회(U-대회)가 대구에서 개최됐다. 본래 대구는 2001년 하계 대회 개최를 준비했으나 IMF 외환위기 등으로 개최를 포기했고, 이후 경제상황이 호전되면서 2003년 하계 U-대회 유치를 준비했다. 2000년 5월 국제대학스포츠연맹(FISU)에 유치신청서를 냈고, 2000년 7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FISU 집행위원회에서 개최국으로 선정됐다. 본교도 개최지 중 하나였다. 위 사진에서 보이듯 본교 총학생회가 중심이 된 전국대학생 준비위원회(이하 대학생 준비위)와 시민위원회가 본교에 설치돼 운영됐다. 또한 개막식의 마지막 성화봉송 주자는 본교 출신 높이뛰기 국가대표 이진택 동문(사범대 체육교육 91)이었다. 두 번째 사진이 바로 이진택 동문이 사용한 성화봉으로, 본인에게 기증받아 대학기록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성화봉에는 ‘2003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게임 최종성화주자 이진택’이라는 글과 함께 이진택 동문의 사인이 새겨져있다. 이진택 동문은 2회 연속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메달리스트이자 현재 높이뛰기 한국기록 보유자(2m 34cm)로 한국 육상계의 전설이다. 8월 21일에서 31일까지 11일 동안 대구·경북 각지에서 U-대회 경기들이 치러졌는데 본교 체육관에서는 펜싱 등의 경기가 열렸다. 대구 U-대회는 북한 선수단이 참가한 대회였던 덕에 큰 화제가 됐다. 개막식에서는 남북한 선수단이 한반도기를 들고 아리랑을 배경음악으로 공동입장했다. 대학생들도 세계적인 스포츠 축제에 빠지지 않았다. 대학생 준비위는 ‘평화로 한마음, 통일로 한 걸음’이라는 주제로 본교 북문에서 축제를 진행했다. 대학생 준비위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즉석설문조사, 동아리를 중심으로 한 문화공연 등을 주최했다. 특히 북한 선수단이 방문한 날에는 성대한 방문행사를 같이 진행하기도 했다. U-대회 기간 본교를 중심으로 해 대학엑스코 행사도 진행됐다. 엑스코 기간 동안에는 세계대학 총장회의와 실무자회의, 세계석학 특별강연 등 학술행사와 응원페스티벌, 월드벼룩시장, 거리의 화가 등 문화행사가 진행됐다.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전국대학생 준비위원회 개소식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마지막 성화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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