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칼 마르크스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전세계적으로 그의 사상이 세계사에 미친 영향을 되돌아보고 있다. 본교 신정완 교수(경상대 경제통상)의 설명을 통해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해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미래를 살펴보자●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

올해 2018년은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탄생 200주년이다. 독일과 중국 등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엔 올해에 마르크스 관련 서적이 몇 권 출판되고 소규모 학술행사가 열렸거나 열릴 예정이지만, 크게 주목할 만한 행사 없이 2018년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다. 마르크스는 20세기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매우 중요한 사상가다.

마르크스는 1818년에 프로이센에서 유대인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르크스는 청년 시절에 헤겔의 철학을 깊이 공부했고, 헤겔 철학을 급진적으로 해석하는 청년헤겔학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혁명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당시 권위주의적 프로이센 국가를 비판하다가 탄압을 받아 프랑스 파리로 망명했다. 파리에서 사회주의자·노동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더 급진적인 이념을 받아들였고 이 시기에 공산주의자로 변모한다. 1848년에는 유럽의 민주주의 혁명 과정에서 『공산당 선언』이라는 유명한 정치 팜플렛을 발간하고 혁명운동에 직접 관여하다가 프로이센 정부로부터 영구 추방당한다. 이후 영국으로 이주하여 평생 무국적자로서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원리 분석에 몰두한다. 그 결과 1867년에 그의 주저인 『자본론』 제1권을 발간했다.

1860년대에 그는 사회주의자·노동운동가들의 국제조직인 ‘국제노동자협회’에서 독일 대표로 활동했다. 『자본론』 1권 발간 이후 국제노동자협회에서 마르크스 사상의 영향력이 점점 강화되어, 마르크스의 생애 말기엔 마르크스주의가 유럽에서 다양한 사회주의 사상 중에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게 됐다.

마르크스는 경제학·정치학·역사학·철학을 포괄하는 장대한 사상체계를 수립했는데, 그의 사상과 이론의 핵심은 ‘역사유물론’과 자본주의 경제 분석이라 할 수 있다. 역사유물론은 역사 발전에 대한 경제 중심적 해석으로서, 역사발전의 핵심 원동력을 인류의 생산능력(=생산력) 발전에서 찾는다. 생산력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생산을 둘러싼 인간 간의 관계, 즉 생산관계가 변화하고, 이에 따라 다시 법률·정치·문화 등 사회의 다른 영역이 변화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사회에서 갈등의 핵심은 토지·공장 등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과 생산수단 소유주에 종속되어 몸으로 직접 일하는 계급 간의 투쟁, 즉 계급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는 인류사의 마지막 계급사회로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통해 무계급 평등사회인 공산주의 사회로 전환되리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 분석은 그의 사상체계에서 가장 중추적인 부분으로서 역사유물론의 시각을 자본주의 경제 분석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영국 고전파 경제학의 노동가치론을 받아들여 이를 더 철저하게 발전시킴으로써, 자본가계급이 수취하는 이윤의 원천이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얻는 잉여가치라는 점을 논증하려 했다. 즉 노동자들이 생산해내는 가치와 노동자들에게 임금으로 지급되는 가치의 차액이 이윤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또한 더욱 많은 이윤을 취득하려는 자본가들 간의 경쟁으로 인해 생산력이 급속히 발전하는 한편, 노동자들의 처지는 더욱더 비참해지고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종속이 심화한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경제공황은 자본주의 경제의 내적 모순의 필연적 표출이며, 경제공황이 일으키는 사회 혼란 속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보았다.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과정에서 기업들의 규모가 커지고, 기업 내 계획적 경영이 발전하고, 주식회사 제도를 통해 기업의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면서, 사회주의 계획경제 수립에 유리한 조건들이 축적되어 간다고 보았다. 또 대규모 공장에 노동자들이 밀집되면서 노동자들의 조직력과 전투력이 강화되어 사회주의 혁명을 담당할 주체인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역량이 강화된다고 보았다. 결국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란 단지 바람직한 사회체제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의 논리에 의해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밖에 없는 인류의 미래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마르크스 사후 마르크스주의의 중심지는 독일 사회민주당이었다. 이 당은 세계 좌파 정당 중 가장 강력한 정당이었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지식수준이 가장 높은 정당이기도 했다. 그런데 1914년에 발발한 1차대전과 1917년에 발발한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거치며 세계 마르크스주의 진영이 분열된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처음에는 전쟁 불참을 선언했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애국주의적 입장으로 돌아서며 독일의 전쟁을 소극적으로 지지했다. 반면에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세력은 제국주의 전쟁을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면서 전쟁에 불참했을 뿐 아니라 전쟁이 낳은 사회 혼란을 활용하여 1917년에 사회주의 혁명을 단행했다. 이후 소련 이라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수립된다. 독일 사민당의 주류는 러시아 혁명에 반대했다.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을 위시한 서유럽 좌파 정당들은 이념 노선이 점점 온건해지면서, 의회민주주의 제도 틀 내에서의 진보적 사회개혁에 집중하게 된다. 이런 이념과 운동노선을 ‘사회민주주의’라 한다. 반면에 러시아 볼셰비키는 자신들이야말로 마르크스의 혁명사상을 제대로 계승한 세력이라 자임하며, 그들의 측면에서 볼 때 이미 개량주의적으로 오염된 용어인 ‘사회민주주의’를 버리고 ‘공산주의’란 명칭을 채택한다. 그리고 소련 공산당을 지지하는 국제 사회주의 세력의 조직인 ‘코민테른’을 조직한다.

레닌 사후 권력투쟁을 거쳐 스탈린 이 집권하며 스탈린주의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표준모델로 정착한다. 스탈린주의의 핵심 요소로는 생산수단의 국유화에 기초한 전면적 계획경제·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발전노선·공산당 일당 독재체제·지도자 숭배·인민에 대한 상시적 감시와 통제 등을 들 수 있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실망과 반발, 그리고 혁명 당시 러시아와는 사뭇 다른 서구 사회의 성격 등에 기인하여 서구에서는 ‘서구 마르크스주의 ’가 발전해갔다. 사상의 자유가 없었던 소련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와는 달리 서구에서는 사상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여 마르크스주의의 학문적 수준이 높아졌지만, 이러한 논의는 주로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학자들의 논의에 그쳐서 현실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수용

한국은 오랜 기간 마르크스주의의 불모지였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정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가 어느 정도 수행되었지만,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국에서 반공주의가 강화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연구와 교육이 불가능해졌다. 마르크스주의 연구가 재개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였다. 광주항쟁을 유혈진압하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의 강권 통치는 한국에서 합법적, 점진적 민주화 가능성에 회의를 갖게 했다. 또 광주항쟁에서 노동자, 빈민 등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는 사정으로 인해 미래 한국 민주화운동의 주역은 노동자계급일 것이라는 전망도 형성되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은 학생운동 등 민주화운동의 급진화를 초래했고,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커졌다. 주로 학생운동 출신자들의 출판 운동을 통해 일본어 마르크스주의 문헌들이 대거 번역되어 소개되기도 했다. 또 1987년 이후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인 김수행 교수가 서울대 경제학과의 전임교수로 임용되는 등 마르크스주의를 합법적으로 연구하고 교육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사건은 1980년대 중·후반에 전개된 ‘사회구성체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한국 사회의 성격을 분석하고 이에 기초하여 사회 변혁의 전략을 마련하는 문제와 관련된 논쟁이었다. 이 논쟁에서 한국 사회를 진단하는 다양한 입장들이 제출되었다. 주변부 자본주의론·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식민지 반봉건사회론·예속 독점자본주의론·중진 자본주의론 등 다양한 입장들이 서로 치열하게 논쟁하였다. 

그러나 국제적 기준에서 보면 너무 늦게 찾아온 한국에서의 ‘마르크스주의 르네상스’는 개시된 지 얼마 안 되어 곧 마감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우선 1989년에서 1990년대 초에 걸쳐 전개된 소련-동구권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인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믿음이 크게 훼손되었다. 또 1987년 이후의 민주화, 특히 1992년 김영삼 문민정부의 등장에 따라 한국에서도 합법적인 방식으로 사회를 진보적으로 변화시켜갈 수 있겠다는 믿음이 커져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급진 이념에 대한 관심이 약화하였다. 또 1997년 외환위기 직전까지 지속한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으로 인해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관심도 옅어졌다. 그러다 1997년에 외환위기를 맞고 그 이후 경제와 사회의 양극화, 빈곤층의 증대를 경험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다소 살아났으나 1980년대의 열기와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미래

21세기 초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필자는 마르크스주의 전체를 통째로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통째로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입장에 반대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어떤 요소는 현재에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예컨대 역사발전에 대한 경제 중심적 해석인 역사유물론의 관점은 정치이념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과학자들도 사회 분석에서 많이 채택하고 활용하는 관점이다. 또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분석에서 주류경제학의 입장과는 달리 자본가와 노동자가 그저 다른 생산요소를 공급하는 대등한 주체인 것이 아니라 양자 간에는 실질적으로 지배-종속 관계가 있다고 보며 양자 간의 이해관계 대립을 강조하는 입장도 현실 적합성이 크다. 자본주의 경제가 낳는 불평등과 경제적 불안정에 대한 비판의 큰 부분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또 청년기의 마르크스가 강조한 ‘노동의 소외’ 문제도 여전히 큰 울림을 준다. 세계적 사상가 중에서 마르크스만큼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현실을 분석하고 대안을 찾기 위해 생애 전체에 걸쳐 분투한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전망한 공산주의 사회상은 현실 사회주의 사회들의 경험을 통해 그 약점이 많이 드러났다. 물론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구상이 그리 구체적이지 않았고, 또 현실 사회주의 사회들이 마르크스의 사상을 온전히 제대로 구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관이 여전히 설득력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자본주의 경제 분석에서도 마르크스는 주로 고전파 경제학의 개념 틀에 상당 정도 속박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많은 난점과 한계를 보였다.

필자는 마르크스주의가 미세한 수정, 보완만 거친다면 그 틀 거의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강건한 사상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요소가 완전히 소멸하리라 예상하지도 않는다. 마르크스 사후 인류는 마르크스가 예상하지 못한 세계사적 사건들을 많이 경험하였고 또 방대한 학문적 지식을 축적했다. 인류의 미래를 인도할 진보적 이념은 이러한 경험과 지식을 충분히 활용하여 형성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아마도 새로운 진보 이념에, 자신의 긍정적 요소를 ‘장기 이식’하는 형태로 부분적으로 살아남을 것이라 전망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 생각한다.

▲1848년 출간된 「공산당 선언」의 책 표지

신정완 교수

(경상대 경제통상)

저작권자 © 경북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