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기원과 현재까지의 궤적을 추적하는 작업은 언제나 가슴 설레고 흥미로운 작업이다. 한민족의 기원에 관하여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것은 퉁구스계 종족인 예맥족의 한 계통으로, 시베리아 바이칼호수 부근에서 발생하고 남하한 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인접 지역에 정착했다는 설이다. 2018년 7월 본교 글로컬문화콘텐츠 창의인재양성사업단(CK-1)에서 실시한 시베리아-바이칼 현지조사는 “한민족 문화의 원류 - 시베리아 바이칼 지역 조사”와 관련하여 한민족 기원 탐색을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탐방 기간은 전체 2주간으로, 동대구에서 동해항까지 6시간의 무궁화 열차 탑승, 동해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24시간 페리 탑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박 4일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탑승,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 호수의 알혼섬까지 6시간의 마르쉬루트카(대중교통수단의 일종) 탑승 등 온갖 육로 및 해양 교통수단을 이용한 쉽지 않은 탐방이었다. 탐방 목적지는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지역에 사는 부리야트 민족의 성지, 알혼섬이었지만, 경유지로서의 블라디보스토크와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는 이르쿠츠크 또한 근대 한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중요한 한민족의 역사적 흔적을 추적해 볼 수 있다.

구소련과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연구를 주 관심대상으로 하고 있는 필자에게 러시아 극동지역은 눈에 익은 지역이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 것이 2012년 겨울이었으니 거의 6년 만인데 많은 것이 바뀐 것 같다. 시내와 루스키섬을 연결하는 웅장한 규모의 새로 건설된 금각만 대교가 대표적이다.

가장 잊지 못할 것은 금각만에서의 솔제니친 동상과 블라디보스토크 전망대 근처의 고려인 작가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 1894~1938) 문학비와의 만남이다. 두 작가 모두 억압된 체제하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해외로 망명 또는 이주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수용소 군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등을 쓴 노벨상 수상작가인 솔제니친은 구소련의 반체제 작가로 해외로 망명하였다가 거의 20여 년 만인 1994년에 모국 러시아로 화려하게 귀국하였다.

반면 1894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조명희는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닌 채 항일문학 활동을 하다가 1928년 소련 연해주로 망명하여 구소련의 대표적인 한인 민족 및 민중 문학가로서 활동을 하였고, 스탈린의 강제이주 시기인 1937년에 체포되어 이듬해 하바롭스크에서 총살을 당하였다. 이후 1980년대 후반 한국의 민주화 시기 이전까지는 반공체제하에서 국내에서 거의 조명을 받지 못한 비운의 시인이자 소설가였지만, 올해 2019년 국가보훈처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내외 항일운동 등을 통해 조국독립에 기여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서 꼬박 4일이 소요된 시베리아 횡단열차 탑승 중 의미 있었던 것은 열차 내 조사탐방 팀원들 간의 간단한 세미나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정차역과 한인 독립운동가” 그리고 “부리야트족과 한민족의 샤마니즘”에 관한 교수와 학생들의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시베리아의 목적지까지 가는 도중 중요한 정차역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하바롭스크, 스바보드니, 치타, 울란우데, 그리고 마지막 이르쿠츠크 등은 모두 우리 선조들이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비롯한 많은 활동을 한 곳이고, 그 흔적이 도처에 남아있다. 시베리아 황단열차 정차역마다 그 지역의 다양한 스토리를 학생들과 공유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탐방단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 여정이 끝나고 난 다음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이르쿠츠크였다.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 초원로를 따라 세워진 도시로 바이칼 호수 서쪽에 위치한다. 이르쿠츠크는 안가라강 제방에 시베리아로 유형을 온 죄수를 위한 감옥 성채로 시작된 도시이며, 이 감옥 성채 주위에서 거주지가 점차 확대되어 형성된 도시이다.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하는 이르쿠츠크 시내는 유럽의 귀족문화와 러시아문화가 융합된 채로 예전 모습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특히 ‘시베리아 바로크’ 형식으로 건축된 가옥들이 인상적이다.

민족사적으로 볼 때 이르쿠츠크는 일제 강점기 한인들의 독립운동이 활발했던 곳으로, 1921년 한인 공산당 창립대회가 바로 이곳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이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소비에트 건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들의 공산당 창립대회가 개최된 건물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한국의 동해항을 출발한 지 8일째 마침내 목적지인 바이칼 호수에서 가장 큰 섬인 알혼섬의 후지르 마을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은 샤머니즘의 성지(聖地)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은 부리야트 민족이 신성시하는 종교 신앙적인 공간이 많이 남아 있으며, 바이칼 호를 배경으로 초기의 정착지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알혼섬은 바이칼 호수에서 가장 큰 섬으로 주로 부리야트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알혼 또는 올혼(Olkhon)이라는 섬의 명칭과 관련하여서 ‘수목이 우거진’을 뜻하는 ‘오이혼(oyhon)’에서 연유하였다는 설과 ‘메마른’을 뜻하는 ‘올한(olhan)’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알혼섬은 대부분이 수목으로 덮여 있고, 연중 강우량이 240mm 정도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메마른 지역이다.

알혼섬에는 여러 개의 마을이 있으며 그중 가장 큰 마을이 후지르 마을(Село Хужир)이다. 이 마을이 유명한 것은 바로 인근에 부르한(Бурхан) 바위(또는 샤먼바위)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르한 바위는 두 개의 흰색 대리석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위 속에는 동굴이 있어 그 속에서 부리야트 무당들에 의한 제사와 다양한 종교의식이 행해지고 있다. 알혼섬에 거주하는 부리야트족들에게 이 샤먼 바위에 대한 믿음은 거의 절대적이어서 마차를 타고 샤먼바위 곁을 지나가는 것은 결코 허용되지 않았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다만 말발굽에 헝겊을 감거나 썰매를 타고만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바이칼 호수의 솟대, 장승 및 성황당 문화가 한민족의 단군신앙과 관련이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1957)은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을 통해 단군신화와 같은 원시적 신앙이 바이칼의 부르한(Бурхан, 불함, 不咸) 바위를 포함한 아시아의 넓은 지역에 산재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알혼섬 곳곳에는 솟대들이 세워져 있으며 부랴트 샤머니즘의 발원지로서 한국의 무속신앙과 유사한 부분이 있기도 하며, 같은 부랴트족과 예맥족 모두 몽골계통이라는 공통점도 많아 한민족의 시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혀 부족함이 없다.

이번 2주간의 시베리아-바이칼 조사는 한민족 문화의 시원 및 바이칼 호수, 연해주, 시베리아 횡단철도, 이르쿠츠크, 러시아 한인의 독립운동, 한민족의 이주와 정착 등을 주요한 키워드로 하였고, 구한말의 북간도 이주, 독립운동, 만주철도, 민족의 이산 및 농민운동 등 격동의 당시 동북아 및 조선의 상황을 연상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탐방을 통해서 비록 한 세기가 흘렀어도 여전히 유라시아 대륙이 진정 한민족의 기원이었을 뿐 아니라 활동무대였다는 인식을 함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향후 좁은 한반도를 벗어나 넓은 유라시아 대륙으로의 적극적인 진출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알혼섬의 후지르 마을에서 본 부르한 바위

▲시베리아 오블류체역에 정차한 시베리아 횡단열차

글·사진

이채문 교수(사회대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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