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경북대학교 학보사 경북대신문 김은지 기자입니다.” 살면서 낯선 사람에게 선뜻 전화를 걸어 내 신분을 소상히 밝히고 인터뷰를 요청해 본 적은 드물었던 것 같다. 단순히 이름 앞뒤에 ‘경대신문’과 ‘기자’라는 말을 붙였을 뿐인데 왠지 모를 끈끈한 소속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낯이 간지러워진다. 그러나 그도 잠시, 다음 할 말을 생각하면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려 했던가? 그나저나 이 사람은 누구인가? 수화기 너머에서는 “네 말씀하세요. 여보세요?”라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사실 저 인사 한마디를 꺼내는 데도 상당한 연습이 필요했다. ‘내가 이렇게 말을 못 하는 사람이었나? 성격이 변했나?’ 얼마전 일청담에서 낮술을 마시던 무리에게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 어울려 놀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성격이 변한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토록 긴장했던 것일까? 둘 다 처음 마주한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나는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어도 상관없는 상황이었고, 하나는 ‘김은지 기자’로서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생각한 ‘김은지 기자’는 시사상식이 풍부하고, 학내 사안을 심층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며, 촌철살인의 질문을 가볍게 던질 줄 알고, 일필휘지로 문장을 써내려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때면 말에서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느껴져야 한다.

그런데 현실 속 김 기자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실제 그녀는 시사상식보다는 SNS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지나가다 보이는 현수막을 보고서야 알아차린다. 이 뿐이랴, 한 번에 끝낼 인터뷰를 두 번 세 번 요청해서 상대방을 피곤하게 하고, 서너 줄짜리 기획의도를 못 써내서 국·부장을 동이 틀 때까지 집에 못 가게 하기도 한다. 김 기자가 이런 사람이다 보니 그녀의 말 절반 이상은 ‘어…’, ‘그…’, ‘저…’가 차지한다. 그렇다. 전혀 기자 같지 않은 나에게 ‘기자’라는 호칭은 너무 낯설고 무거운 이름이었다.

우리는 흔히 거짓을 사실인 양 퍼뜨리고 기득권에 빌붙어 편향된 기사를 쓰는 기자들을 ‘기레기’라고 부른다. 나도 그런 기자들을 몹시 싫어한다. 그런데 어디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누군가의 흠이 보인다면 그 흠이 내게도 있는 것이라고. 기사를 쓸 때의 나를 돌이켜 보면 팩트체크 과정을 귀찮게 여겼고, 혹시나 논조가 불명확한 글을 쓸까봐 소심하게 글을 깨작였다. 아아. 지금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이 기레기스러운 건 아닌가?

이런저런 스트레스에 휩싸여 눈 밑이 퀭해질 때 즈음 선배기자 한 분은 너무 무리하면 일찍 지친다며 무심한듯 위로의 말을 건넸다. 폭주기관차처럼 자학하던 내게 제동장치 같은 말이었다. 그래. 걷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뛰나. 꾸준히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보면 언젠간 기자다워지겠지. 이 믿음으로 어설픈 기자노릇을 한지 어느덧 4주가 지났다. 나는 여전히 기사쓰기를 버거워하고 있고 누군가와 인터뷰를 할 때면 항상 심호흡부터 먼저 하고 시작한다.

그래도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을 믿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자라는 이름의 무게에 마냥 짓눌리지만은 않게 됐다. 매 호 신문을 발간하면서 발전하는 스스로를 지켜보니 기자 일이 즐겁게까지 느껴진다. 아직은 처음이라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 뿐이지만 언젠가는 날카롭고 심도 있는 기사의 무게도 너끈히 감당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마침표를 찍어본다.

김은지

정기자

저작권자 © 경북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