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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기획

10월, 역사 뒤의 숨은 진실을 재조명하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역 앞에 모인 노동자와 농민의 함성은 높아만 가고 있었다. 이들을 포위한 경찰들은 모두 손에 장총을 들고 있었다. 그 때 흥분한 누군가가 던진 돌멩이 한 개가 경찰을 향해 날아들었다. 당황한 경찰이 총을 쏘면서 ‘무차별 발포’가 시작됐다. 이 날 노동자 한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그는 사건의 첫 번째 희생자였고 이 일은 12월까지 줄기차게 이어진 10월 항쟁의 촉발이었다.

부산에서 대구로, 그리고 남측 전체로
10월 항쟁은 1946년 9월 총파업에서 이어졌다.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단체가 추진한 9월 총파업은 9월 23일 부산 철도 노동자 파업에서부터 시작됐다. 뒤이어 대구에서도 철도·언론·우편 등 각종 산업의 노동자들이 일급제 반대, 임금 인상, 쌀 배급 등을 요구하며 총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곧 남측 전역으로 확산됐다. 여기에 식량난까지 겹치자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마저 쌀 배급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노동자들은 대구역 인근 조선노동조합 대구평의회 사무실 앞에서 매일 집회를 열었다. 10월 1일에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수천 명의 시민과 노동자들이 모인 가운데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경찰과 시민의 충돌이 있었고, 시위하던 노동자가 사망하기까지 한 것이다.
이튿날 자그마치 1만여 명에 달하는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전날 사망한 노동자의 시신을 메고 대구경찰서로 몰려들어 경찰서를 점거했다. 소식을 들은 대구 전역의 시민들도 각 지서를 공격, 경찰을 무장 해제시키고 폭력을 가했다. 미 군정청이 전차와 기관총 부대를 동원해 이들을 진압한 뒤에야 대구의 질서는 회복됐다. 그러나 이러한 시위의 물결은 경북 지역을 넘어 남측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돼 12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좌우가 힘 합쳐 ‘매국노’에 반대하다
미 군정 보고서에 따르면 10월 항쟁의 주요 원인은 식량 공급 부족이라고 기술돼 있다. 이승만이 주도하던 민족통일총본부도 ‘근본 원인은 양곡 문제’라고 했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원인은 미군정과 경찰 내부에 친일 기회주의자들이 잔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민중을 대하는 행태는 일제강점기의 일제와 별다를 바 없었고, 그들에 대한 시민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이일재 씨는 “1945년은 대풍년이었는데도 미 군정은 식량 배급을 중단했고, 콜레라로 다른 지역과의 교통까지 차단돼 아사자가 속출했다”고 증언했다.
10월 항쟁이 대구에서 시작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허종 교수(충남대 국사학)는 “대구·경북 지역은 좌우익 세력 간에 낮은 단계에서나마 협력이 이뤄지고 있었고, 이러한 좌우합작에 대한 미군정 측의 탄압도 다른 지역에 비해 덜했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이들은 경북도군청과 함께 ‘대구공동위원회’를 결성해 기아를 비롯한 사회 현안을 함께 해결하기도 했다.

‘폭동’인가, ‘항쟁’인가?
10월 항쟁은 바라보는 쪽의 관점에 따라 ‘대구 폭동’, ‘10·1 사건’, ‘10월 항쟁’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대구 폭동’은 좌익 세력이 이 사건을 주도했다는 점과 전개 과정에서 잔인한 폭력이 이뤄졌음을 강조한 명칭이다. ‘10·1 사건’은 의미 부여가 이뤄지지 않은 가치중립적 명칭으로, 언론과 학술적 연구에서 편의상 사용돼 왔다. 그리고 ‘10월 항쟁’은 이 사건을 민주화와 사회변혁운동의 중요한 과정선상에 놓고 이른 말이다. 허종 교수는 “10월 항쟁의 명칭에 대해서는 아직 문제 제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며 “민족적,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구성원들의 의지에 초점을 맞추면 ‘항쟁’이라 부를 수 있다”고 평했다.
본교에서도 10월 항쟁 6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과거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곡해되어 온 사건에 정당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특히 이 학술대회에서 전현수 교수(인문대 사학)는 국가기록원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10월 항쟁 당시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전 교수는 당시 항쟁에 참가한 사람들의 재판을 전담했던 미 군정 측의 기록 또한 공개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윤갑 교수(계명대 사학)는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은 자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선 외세가 아닌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어야 함을 국민 스스로 자각하게 했다는 의의를 지닌다”며 “앞으로도 좀 더 많은 사실을 밝히고 그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함으로써 역사를 올바르게 해명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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