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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유변

철의 변화에 즈음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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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침 저녁으로 쌀쌀하다. 특별히 감기 기운이 있지도 않은데 코가 막힌다. 자고 일어나면 건조한 눈가에는 눈곱이 가득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등하교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공연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잠을 청하려 누워도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친한 친구라도 불러 술 한 잔 마시고 잠들고 싶어진다. 증상은 다양하지만 원인은 한 가지다. 가을이 오고 있다. 내 몸과 마음이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
2. ‘철이 들다’라는 표현이 ‘철(계절)의 변화를 느끼다’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라디오를 듣다가 지나치듯이 들은 내용이다. 단어 간 발음의 유사성을 이유로 생긴 단순한 말장난일지도 모른다. 설령 말장난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그럴싸하다면 뭐, 한 번쯤 속아 넘어가면 어떤가. 이래저래 변명을 댔지만 사실 내가 그냥 귀가 얇다. 그럴싸한 저 말에 홀라당 넘어가버렸다.
3. 농경사회였던 과거에는 시기에 맞춰 준비해야 할 작업이 많았다. 가을이 다가오면 추수 준비를 하고, 겨울이 다가오면 식량을 비축해두는 일 따위가 그렇다. 그래서 철의 변화를 느낄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을 때, 비로소 성숙한 어른의 몫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4. 나의 이름에는 ‘철’이라는 글자가 있다. 지지리도 철이 들지 않을 것을 부모님께서 미리 아시고 한 발 앞서 이름에 ‘철’을 넣으셨는지도 모를 노릇이다. 물론 부모님은 이런 시덥잖은 농담을 즐기시지 않으시기에 여쭤본 적은 없다. 어쨌든 그러한 이름 덕분에 학창 시절 동안 “철 좀 들어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을 때마다 “저 이름에 ‘철’ 들었는데요”라는 아재개그를 던지며 착실히 매를 벌곤 했다.
5. 구구절절 설명했듯이 이제 나는 철의 변화를 충분히 아는 나이가 됐다. 사실 나이와 관계 없이 철의 변화를 모르기가 더 어렵다. 달력을 보면 세 달 단위로 움직이는 철의 변화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조금 무심하더라도 바뀌어가는 주변 사람들의 복장을 본다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일기예보를 듣는다면 알 수 있다. 철의 변화를 느끼는 것만으로 성숙한 어른이 됐다고 할 수 없는 세상이다. 너무나도 쉽게 철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요즘 세상에 ‘철이 든다’는 것의 바로미터는 무엇일까?
6.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지금까지 글을 읽으면서 이미 눈치를 챘을 것이다. 눈치 못 채기가 더 어려웠나. 그렇다. 나는 아직 철이 덜 들었다. 동기들에게 뒤처지던 대학생이 다른 학교에 진학해 늦깎이 대학생이 되고, 한 술 더 떠 동기들에게 뒤처지는 늦깎이 대학생이 되기까지 5년 반이란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예전 동기들은 어느 새 취업을 해 성인으로서 사회로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전에는 어린 나이가 무기였는데 이제는 대학 내에서 어리다고 할 수 없는 나이가 됐다.
7. 앞에서 죽는 소리 다해놓고 뻔뻔하게 마무리를 하려한다. 사실 철이 들지 않은 것이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철이 들지 않아 유쾌한 기억도 많다. 뒤처져 걷는 걸음 덕분에 쉽게 보이지 않던 것을 살펴볼 여유가 생기기도 했다. 근처에 보이는 경쟁자와 속도를 맞추기 위해 종종걸음 칠 필요도 없다.
8. 노자는 <도덕경>에서 ‘유수부쟁선’이라 했다. 흐르는 물은 앞뒤를 다투지 않는다는 뜻이다. 남들보다 걸음이 늦어 세상의 시선에 조바심이 생기는 나날이다. 다만 이제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막히면 돌아가고, 빈틈이 보이면 채운 후 다시 나아가면 될 일이다.


장은철 탐구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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