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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어떤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다림’을 뜻하는 말이다. 자신이 못하는 일이나 남이 해줘야만 하는 일에는 기대를 하게 된다. 마치 리모콘을 쥔 사람을 향해 “오늘 하는 수목드라마에 채널을 멈춰줬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는 소소한 것처럼 말이다.
기자는 언젠가부터 이런 기대가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진심을 다했으니 그냥 날 저버리고 가진 않겠지”, “내가 이 정도 했으면 저 사람이 나에게 상처주지 않겠지”라고 기대해도, 상대가 기대와 반대로 행동해 버리면 그만이다. 오히려 기대하지 않으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뭔지 찾게 되고, 결과가 좋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을 수 있다. 이는 좋지 않았던 일을 훌훌 털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데에도 유용하다. 
그러나 좀 더 사회적인 활동을 할수록, 최소한의 기대가 필요한 행동들이 생긴다. 정치인은 유권자에게 더 많은 ‘표’를 기대하게 된다. 유권자는 “내가 원하는 정책을 펴주겠지”라는 기대로 투표한다. 대학에 등록할 때에도 “내가 뭔가 얻어갈 수 있는 수업을 제공하겠지”라는 기대가 없다면 등록금을 납부하기 망설여진다. 
참 처절한 건, 실망을 안겨준 대상일지라도 필요한 일을 진행하려면 다시 기대를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대학평의원회를 만들고 싶다면 본부와 교수회가 다시 합의하길 바라야 한다. 물론 실망한 다음의 기대는 그 전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해도, 실망한 ‘느낌’만큼은 머릿속에 남아 있다.
지난 25일 본교 제22대 교수회평의회는 본부 보직자 4인에 대한 해임권고안을 의결했다(본지 1619호 “교수회, 본부 보직자 4명에 ‘해임권고’”참고). 교수회가 본부의 특정 직책의 보직자를 해임권고한 것은 십수년 만이다. 본부가 대학평의원회 합의안을 무효화하고, 중장기발전계획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구성원들의 합의에 기초하지 않은 것이 해임권고의 근거다. 이를 뒤집어 보면 교수회는 대학평의원회 합의안을 교수평의회로 넘겨주길, 중장기 발전계획을 꼼꼼하게 세워주길 기대했다는 뜻이다.
기대를 저버린 쪽도, 기대한 쪽에게도 사정은 있다. 애초에 교수회가 과한 기대를 했던 건지도 모른다. 다만 최근엔 본교 구성원끼리 실망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BTL합의를 학생 논의 없이 할 때에도(본지 1615호 “생활관 수용 인원 감축에 성난 학생들” 참고), 학생들이 머물던 봉사관 1층이 갑작스레 창업 공간으로 변할 때에도(1615호 “‘봉사관 1층’이 ‘창업보육공간’으로 창업공간에 빼앗긴 학생 생활공간” 참고), 우리는 실망과 기대를 거듭해왔다. 
사실 처절함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개인적인 삶에서 그랬듯 기대를 하지 않으면 된다. “어차피 내 탓 아닌데 무슨 상관인가?”하고 말이다. 기대의 한계가 0으로 수렴된 본교 구성원들은 이미 그렇게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학교에 대한 기대가 없는 사람은 등록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등록하지 않는 학교는 존재할 수 없다. 기대하지 않는 학교는 어떻게 될지, 참 ‘기대’가 된다. 

이광희
탐사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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