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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글쓰기는 힘이 세다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 그는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서가 본인의 권력에 해를 끼칠 것을 우려해 대부분의 역사서를 불태웠다.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도 글을 무서워했고, 오늘 본교의 누군가도 글의 첫 문장을 쓰기 위해 몇 시간을 책상 위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글은 어떤 힘이 있는 걸까? 본교에서 ‘대학글쓰기’ 강의를 담당하고 있는 염철 초빙교수(교양교육센터)의 설명을 통해 글쓰기의 힘을 알아보자●


소설가 김영하가 대학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나는 용서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을 쓰라고 했을 때, 한 학생이 ‘아직도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며 글쓰기를 포기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 학생은 글쓰기가 문장을 단순하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 속에 자기 삶의 일부 혹은 전부를 담는 행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글에는 거짓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야 하며, 그 진심이 독자에게도 그대로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글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힘이 강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역사를 바꾸는 글

글의 힘이 강한 또 다른 이유는, 글을 매개로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 있다. 개체의 신체적 능력으로만 따지면 인간이 동물보다 뛰어난 존재라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인간은 글이라는 수단을 활용해 다른 사람과 생각이나 감정을 공유하고 서로 연대하는 능력을 지녔다. 이 때문에 인간은 동물과 달리 문화를 발전시키고, 그 문화를 후손들에게 전승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글이 현실에 미치는 실제적인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그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 중 하나는 진시황이 자행한 ‘분서(焚書)’이다. 물론 이는 글이 현실에 미치는 강력한 힘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로 이루어진 매우 끔찍한 사건이었다. 진시황은 재위 34년(기원전 213년) 함양궁에서 천하통일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인다. 이때 순우월이라는 사람이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간언을 한다.

“은나라와 주나라가 천 년이나 왕위를 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신이나 친인척을 제후로 봉하여 이들로 하여금 왕실을 보호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왕께서는 지역을 분할하여 군현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왕족이라고 해도 일개 백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략)… 지나간 역사를 거울로 삼지 않고 장구한 안전을 얻었던 예는 없습니다.”

순우월은 『서경』에 언급된 은나라와 주나라의 역사를 인용하여 진시황이 채택한 군현제를 비판했던 것이다. 그러자 승상 이사가 상소를 올려 민간에 퍼져 있던 『시경』과 『서경』을 포함한 제자백가의 책들을 모두 수거하여 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사의 상소를 받아들인 진시황은 의약, 복서(卜筮), 농사에 관한 서적을 제외한 대부분의 책을 불사르는 ‘분서’ 조치를 단행한다. 진시황과 이사는 그와 같은 책들이 현실에 미치는 강력한 힘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1789년에 일어났던 프랑스 혁명은 글이 현실에 미치는 긍정적인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프랑스에는 “그것은 볼테르의 잘못이라네, 그것은 루소의 잘못이라네”라는 관용구가 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5부에서 등장인물 가브로슈가 부르는 노래 가사에도 등장하는 이 표현은 루소나 볼테르와 같은 계몽사상가의 저작물이 프랑스 혁명의 기원과 밀접하게 관련됐다는 뜻으로 쓰인다. 로버트 단턴은 『책과 혁명』에서 이와는 조금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계몽사상가 테레즈, 또는 디라그 신부와 에라디스 양의 사건에 관한 보고서』나 『뒤바리 백작 부인에 관한 일화』와 같은 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들이 계몽사상가들의 저작물보다 당시 대중의 여론을 형성하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간에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는 데 글이 미친 영향력이 매우 컸다는 것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김현은 「소설은 왜 읽는가」에서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세계를 변형시키려는 욕망을 드러낸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다시 말해서 소설가는 소설을 쓰면서 “자기 욕망의 소리에 따라 세계를 자기 식으로 변모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디 소설가에게만 국한되는 설명이겠는가? 세계를 자기의 욕망에 맞추어 바꾸고 싶어 하는 모든 장르의 작가들도 글쓰기를 통해 이러한 욕망을 드러내려 한다. 작가의 그 욕망이 독자들의 욕망과 조화롭게 소통할 때 역사는 거대한 변혁의 수레바퀴 위에 올라타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반성하는 글

한편, 글쓰기는 지나온 삶을 성찰함으로써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삶을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도 유용하다. 많은 현대인들은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정신적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자기 성찰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자기를 성찰할 기회를 만들지 못하면 자기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어렵고, 그렇게 되면 남이 원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글을 쓰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다. 이번 학기 ‘대학글쓰기’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이 내게 보내 온 메일 하나를 소개하겠다.

“주제를 ‘경마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한국 마사회의 공중파 방송 광고를 허용해야 한다’로 정했는데, 이 주제와 반대되는 관점의 책을 읽고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상대방 주장을 반박할 게 없었습니다. 왜 사행산업을 규제하는지 알 것 같았고, 이 주제가 제 생각이랑 다른 것 같아서 다른 주제로 급하게 변경해서 카페에 올렸습니다.”

이 학생은 처음에는 ‘경마산업’을 옹호하는 관점에서 글을 쓰려고 했다가, 경마산업을 옹호하는 것이 자신의 가치관에 어긋난다고 판단해서 ‘승마산업의 발전을 위한 방안’으로 주제를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학생은 자신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자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글을 쓰다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글쓰기가 필요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의 작가 김애리는 성찰적 글쓰기가 바꾸어 놓은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두 번은 절대 모른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누구든 그럴 것이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지나고 매일 쓰는 시간이 십 년을 넘어서자 인생이 왈칵, 방향을 틀었다. 알고 보니 나는 쓰는 내내 아주 미세하게 나를 바꿔가고 있었다. …중략… 그저 나 자신에 대한 이해의 폭이 2차선에서 4차선 정도로 확장되었으며, 그로 인해 남들이 주입한 가짜 행복이나 성공의 의미 말고 내가 정의하는 것들을 영혼 한가운데 문신처럼 새기게 되었음이 전부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건 말하자면 최고 명문대학에서도 배울 수 없는 인생의 지혜, 세계 일주를 다섯 바퀴 해도 얻지 못할 귀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20대를 ‘노동의 역사’라고 규정할 만큼 김애리는 돈을 벌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해야 하는 삶을 살았다.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노동의 의미와 가치 따위를 따지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십 년 동안 지속적으로 글을 쓰면서 그는 남들에게서 주입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정의한 행복이나 성공의 의미를 “영혼 한가운데 문신처럼 새기게”된다.
글쓰기가 이를 가능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십 년 넘게 글을 쓰는 동안 끊임없이 자기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을 하는 과정들을 글쓴이가 견뎌냈기 때문이다. 김애리는 이 글쓰기의 과정에서 “100번의 심리 치료에 버금가는 치유와 자유”를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니까 자기가 진심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찾고 싶거나 심리적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은 꾸준히 글쓰기를 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글을 쓰는 이유

물론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현실을 변혁한다거나 자신을 성찰하는 것과 같이 꼭 거창하고 진지한 것일 필요는 없다. 글쓰기는 여러 가지 실용적인 목적을 이루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 우선, 자기를 계발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쓸 수도 있다. 한미화가 「글쓰기는 살아남고 이겨내고 행복해지는 일이다」에서 말한 대로 “생각한 것을 글로 쓸 수 있는 개인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열리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소개서를 잘 쓰는 사람은 좋은 직장에 취업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좋은 기획안을 작성할 능력을 갖추면 승진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블로그나 카페에 글을 올려서 독자의 공감을 얻을 줄 아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돈을 벌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또한, 리처드 폴과 린다 엘더가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가』에서 말한 대로 대학에서 학습을 하는 데도 글쓰기를 활용할 수 있다. 그들은 학습자가 어떤 학문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그 학문에서 다루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을 정의하고,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예를 들고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과학을 공부한다면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과학자들이 만족할 만큼 쓸 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처럼 과학에 대해 과학자들이 만족할 만한 글을 쓰기란 쉽지 않겠지만 공부를 제대로 하려는 학습자라면 그들의 충고대로 어떤 개념을 누군가에게 충분하고도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자신이 설명하려는 개념을 글로 표현해 보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학습 방법이 된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이상에서 말한 것처럼 글을 쓰는 목적은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어떠한 목적의 글이라도 그것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크다. 따라서 글쓴이는 글쓰기 윤리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우선, 글을 쓰려는 사람은 사실을 왜곡하는 글을 써서는 안 된다. 애초에 없는 사실을 꾸며 내고, 사실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사실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사실을 확대하거나 축소하여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사실을 왜곡하면 개인이나 집단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타인에게 법적, 정치적, 경제적 손실을 입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최근에 와서 더욱 더 심각해진 가짜 뉴스의 폐해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또한 표절을 해서는 안 된다. 표절이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나 저작물을 훔치는 범죄 행위이다. 따라서 표절을 할 경우 무거운 법적, 경제적 책임을 져야 한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표절이 횡행하면 그에 비례하여 창의적인 발상을 하려는 사람들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애써서 만든 논문이나 작품이 누군가에 의해 쉽게 도용될 수 있다면 누가 창의적인 작업을 하려고 하겠는가? 독창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농사짓기 힘들어서 자식들에게는 농사 말고 공부를 시키고 싶었던 부모님 덕분에 대학에 남아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런 내가 학생들에게 글쓰기가 힘드니까 할 수만 있다면 글 안 쓰고 사는 게 좋다고 충고한다면 학생들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마도 나를 비웃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글 쓰는 일이 농사짓는 일에 비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농사짓는 일에 버금가는 힘을, 때로는 그보다 더 많은 힘을 쏟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가끔 꿈을 꾼다. 글을 쓰지 않아도 누구든지 사는 데 불편함이 전혀 없는 세상을. 자기를 성찰하는 글을 쓰지 않아도 자기 자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세상을,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도 없어서 문제의 해결방안에 대해 글을 쓸 필요가 없는 세상을, 글이 없어도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세상을……. 그러나 이 꿈이 유토피아에서나 이루어질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잘 알다시피 21세기는 정보화 사회이며, 그 정보들은 대부분 글로써 유통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글을 안 쓰고 사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SNS, 문자, 이메일, 블로그, 카페 등에 올리기 위해 쓰는 글, 회사의 업무를 위해 작성하는 각종 실용적인 글은 물론이고, 자기 계발, 웰빙, 힐링을 위해 쓰는 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글을 쓰도록 요구받는 시대라는 것이다. 어차피 그런 시대라면 한번쯤 글쓰기와 독하게 부딪혀 보기를 바란다.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때처럼 처음에는 넘어져서 상처를 입겠지만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글쓰기라는 자전거를 능숙하게 운전할 때가 올 것이다.



염철 초빙교수
(교양교육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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