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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론

학력주의 사회와 불공정의 르상티망

우리 소설에서 대학생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 것은 1960년대 초의 일이다. 김승옥의 소설은 지방 출신의 대학생이 서울의 대학에 진학하면서 겪는 좌충우돌, 그리고 그로 인한 환멸을 표현하고 있다. 「생명연습」과 「환상수첩」을 발표할 무렵 김승옥은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으니, 대학생인 작가가 대학생을 주인공으로 삼아 대학생의 경험과 감정을 표현한 ‘대학생 소설’이 바야흐로 출현한 셈이다. 
이런 소설의 출현은 대학의 급격한 팽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해방 후 7000명 정도였던 대학생 수가 1960년 무렵 10만을 헤아릴 정도였다고 하니 대학생의 존재는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되었음직하다.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사건은 역시 4·19혁명이었다. 대학생이 혁명의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혁명 이후 대학생들은 스스로를 4·19세대로 규정하고 기성 세대, 기성 문단과 맞서 ‘새로운 시대 문학의 성립’을 외칠 수 있었다.  
「환상수첩」의 주인공이 경험한 대학은 ‘실망의 연속’이었다. 교수의 강의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린 귀걸이’식으로 학생들의 공격을 빠져나가기 위한 전제를 만들어내기에 바쁘다. 서울 출신의 친구를 사귀지만 그에게서 배운 것은 위악(僞惡)밖에 없다. 지방 출신의 여학생과 연애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은 가난하다. 가난해서 수치스럽다. 사랑을 표현하는 걸 타락으로 여기는 주인공은 여친과 성관계를 맺고는 ‘순전히 성욕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결국 사랑에 실패한다. 대학에서의 경험은 환멸뿐이었다. 
이 환멸에서 학력주의의 그늘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학력주의 사회에서 명문 대학의 졸업장은 사회의 상층부로 진입하기 위한 시민권이 된다. 김승옥의 또 다른 소설 「내가 훔친 여름」의 주인공들이 명문 대학의 배지만을 밑천 삼아 무전여행에 나서는 데서 보듯, 지방 출신으로서 서울의 명문 대학에 입학한 것은 출세를 위한 기회를 잡은 셈이다. 하지만 학력주의 사회의 내부자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에서 지방 출신의 대학생들은 자신이 아직은 경제적, 문화적 경계 바깥에 있음을 확인해야 했다. 김승옥 소설의 주인공들은 입사(入社)에 번번이 실패하지만, 그것은 지방 출신 대학생이 일시적으로 겪는 불안정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019년 11월, 또 한 번의 수능시험을 앞두고, 대학입시 제도의 공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학생부의 공정성을 불신하는 이들은 대입 전형에서 정시 비중을 높이는 것이 공정성을 확보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수능시험 성적이라는 수치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이 오히려 실질적인 기회균등을 해친다는 비판이 그 핵심이다. 교육 당국은 특목고를 폐지하고 정시 비중을 높이는 쪽으로 제도의 방향을 잡아가고 있지만, 이런 조치로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공정을 요구하는 목소리 이면에 놓인 감정도 복잡하다. 우리 사회가, 특히 교육제도가 불공정하다는 데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있다. 또 이러한 불공정을 바로잡지 못하는 데 대한 만성적 무기력이 있다. 자신이 불공정의 희생자라는 식의 피해의식도 있다. 여기에 사회적 이목이 쏠리는 불공정한 사례가 불거지게 되면 불공정에 대한 분노가 폭발적으로 분출된다. 이런 만성적 혹은 폭발적 분노는 때때로 불공정에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특정인을 향해 투사되어 공분(公憤)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감정을 ‘불공정의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 부르자. 문제는 이런 감정이 어디로 향하는가에 있다. 김승옥 소설의 주인공들은 수치와 환멸로 인해 연민에 실패하고 사랑도 깨어진다. 이들은 ‘타인은 모두 속물’이라 여기면서 자신과 타인을 날카롭게 구별 짓거나, ‘당신이 곧 나’라는 식의 나르시시즘으로 빠져든다. 타인과 더불어 사는 보다 넓은 세계로 나가지 못한다. 불공정의 르상티망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소위 공정한 입시 제도가 학력을 기준으로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는 방편이 되는 것은 아닐까?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르상티망을 노예의 도덕으로 규정하면서도 그것이 창조적일 수 있고 새로운 가치를 낳을 수 있다고 보았듯이, 불공정의 르상티망이 학력주의 사회의 해체를 겨냥할 수는 없을까? 
공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정시 확대나 특목고 폐지로 완전히 해소될 것 같지는 않다. 문제는 대학이 서열화되어 있고 이 서열에 의해 한 사람의 능력, 심지어 그 사람의 존재 가치가 평가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입 제도이건 간에 그 제도를 통해 서열화된 대학에 들어가고 그 결과가 이후 삶을 결정한다면, 그리하여 학력주의 사회의 바깥 어두운 데 떨어져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이들이 있다면, 대학 입시에서의 결과론적 공정이 큰 의미를 지니기는 어렵다. 르상티망의 역설을 통찰한 니체의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하자. “오래된 의기소침, 중압감, 피로가 이러한 처리 과정의 체계로 철저히 극복되었고, 삶은 다시 무척 흥미로워졌다.”


류동규 교수
(사범대 국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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