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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기록관-우리가 몰랐던 경북대 이야기

11. 시대정신의 주체로 살아갔던 경북대학교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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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1월 5일 오전 10시 ‘경북대학교반독재구국투쟁위원회’ 명의의 <반독재민주구국선언문>이 교양과정부(현 생명공학관)와 몇 개의 건물에서 일제히 흩날렸다. 선언문 살포와 함께 ‘유신헌법 철폐하라’를 외치며 유신체제의 엄혹한 정국 속에서 지역 최초로 반유신 시위가 시작되었다. 경북대학교 한국풍토연구회 소속 학생들이 주도한 반유신 시위는 순식간에 경북대 학생들을 일청담으로 모이게 만들었고, 학생들은 ‘유신반대’, ‘학원자유화’를 외치며 경북대 후문을 나와 경북도청(현 대구 시청 별관)까지 행진하였다. 

1973년 하반기 경북대와 전국대학에서 전개된 반유신 시위는 같은 해 12월 24일 종교인, 정치인, 재야지식인들이 결성한 ‘개헌청원운동본부’에서 유신헌법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으로 이어졌다. 반유신운동이 전국화되어가는 것에 위기를 느낀 박정희정권은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하였다. 경북대를 비롯한 전국의 대학은 더욱 긴밀한 연대의식으로 정국을 돌파해나가기로 결의하였다. 

긴급조치 1호 발동 이후 반유신 시위의 첫 신호탄도 경북대가 쏘아 올렸다. 그러나 1974년 3월 21일 경북대 시위는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 의사만 가져도 15년형을 받을 수 있는 긴급조치 1호는 학생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경북대 반유신 시위 이후에도 시위는 전국적으로 계속 전개되어 나갔다. 학생들은 시위규모를 좀 더 영향력있게 보이고자 실재하지 않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조직을 만들고, 이 명의로 1974년 4월 3일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유신반대 선언문을 뿌렸다. 박정희정권은 이날 밤 10시를 기해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는데, 이 조치는 민청학련을 겨냥해 선포된 것이었다. 긴급조치 4호 선포 다음 날부터 반유신 시위 가담 학생 검거를 시작하였다. 전국적으로 총 1,024명이 체포되었고, 경북대학교도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하여 13명이 중앙정보부에 검거되었다.   

현재 위헌판결을 받은 긴급조치는 유신헌법 53조에 근거한 법적 조치로,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한 무소불위의 초헌법적 권한이었다. 유신식 총 9번의 긴급조치가 발동되었는데, 이 중 긴급조치 4호는 위반 시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유신 시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학생들에게 강력한 처벌을 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반유신 세력을 국민들로부터 완전히 배제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전복집단, 공산주의세력이라는 프레임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반유신 시위 학생을 조종하는 배후세력이 있어야 했고, 그 조직은 반정부 성격을 넘어 체제 전복적이어야 하고 용공집단이어야 했다. 

박정희정권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 반정부적 성향을 가진 사회운동세력들을 반체제인사로 낙인찍어 이들을 용공분자로 조작하는 공안사건을 지속적으로 만들어왔다. 1974년 4월 중앙정보부는 대부분 무혐의로 끝났던 1964년의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을 대거 체포하여 가공할 만한 고문 속에 공안사건을 조작해 내었다. 1974년 5월 27일 군검찰부는 용공집단이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하여 체제를 전복하려고 했다는 소위 ‘인혁당재건위사건’을 발표하였다.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재건위사건은 박정희정권이 반유신국면의 전환과 체제안정을 위한 목적으로 조작한 정권 최대의 공안사건이었다. 

이 두 사건에는 경북대 학생들이 대거 연관되어 있는데, 경북대학교 기록관에 이들과 관련된 자료가 있다. 소장자료는 민청학련과 인혁당재건위사건의 비상보통군법회의, 비상고등군법회의, 대법원 판결문과 사건 관련자들의 진상규명서 그리고 사형집행자 유족들의 친필 탄원서 등이다. 두 사건에 관련된 경북대생은 여정남, 이강철, 이재형, 림구호, 정화영, 임규영 등 총 17명이었다. 이들은 긴급조치 제2호에 의해 구성된 비상군법회의에서 군인들에게 1심과 2심 재판을 받았다. 당시 군사법정은 서울 용산구 삼각지 부근에 있는 국방부 청사 뒤에 있었다. 3심인 대법원은 군인 신분이 아닌 13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었다. 대법원의 역할이 법률적 해석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법원 판결문은 총 79장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었다. 경북대학교 기록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법원 판결문은 <판결주문> 13장 분량만 있으며, <판결이유>에 대한 기록은 소장하고 있지 않다. 

다시 대법원 판결문이 낭독되던 당시의 현장으로 가보자.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자들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진행되었다.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는 한 사람도 법정에 출정하지 못했다. 대법원은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 38명에 대한 법정형을 확정했다.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과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여정남은 상고를 기각당하고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들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 한 번도 감형되지 않았으며 종심인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판결을 받았다. 사건 관련자들의 법정형 확정 판결문을 읽는데 소요된 시간은 10분 정도였다. 이 재판에 연루된 경북대 출신은 총 6명이었다.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이재형(정치학과 1963), 림구호(물리학과 1967), 민청학련사건으로 여정남(정치학과 1962), 이강철(정치학과 1966), 정화영(정치외교학과 1967), 임규영(일반사회교육과 1971)이었다. 나머지 민청학련사건 관련 경북대생은 상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법원 판결문에 이름이 빠져 있다.  

대법원 판결은 국가폭력을 정당화시킨 법리적 해석이었고, 판결 18시간 만에 경북대학교 출신 여정남 등 8명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집행을 했기 때문에 사법살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의혹이 많은 사형집행이었다. 2002년부터 2007년에 걸쳐 진행된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재건위사건의 재심공판을 통해 사건 관련자들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또한 국가로부터 손해배상도 받았다. 그러나 국가가 사죄를 하고 배상을 한다고 해서 국가폭력으로 죽은 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까지 빨갱이로 낙인찍혀 살아온 세월이 보상이 되는 건지 묻고 싶다. 더구나 푸르른 청춘을 저당 잡았는데.

경북대학교 사회대 앞에는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재건위사건, 남민전사건의 경북대 출신 희생자 여정남, 이재형, 이재문을 기리는 ‘여정남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해마다 4월 9일을 전후하여 이 곳에서는 이들을 기리는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이 공원이 강의 들으러, 식사하러 지나치는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를 위해 저항했던 경북대학교 학생들의 시대정신을 떠 올리게 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한 번쯤 고민하게 만들어 주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인혁당재건위사건 대법원 판결문 사본



윤정원

(인문대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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