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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기록관-우리가 몰랐던 경북대 이야기

28. 경북대학교에도 현충시설이 있다? - 장윤덕 의사 순국기념비(張胤德義士殉國紀念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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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대학기록관
우리 학교 정문 근처에는 ‘센트럴 파크’라 하여 썩 잘 꾸며진 공원이 있다.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예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학생들이나 지역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소풍을 즐기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특히 한여름 저녁에는 근처 농구대에서 농구를 하는 이들, 가볍게 친구들과 맥주를 즐기는 이들, 야외 공연을 하는 이들 등으로 활기가 넘치는 곳이다. 그런데 이러한 풍경은 비교적 최근의 모습이다. 십수 년 전, 필자가 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다소 음침한 느낌마저 감돌았다. 당시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얼핏얼핏 이질적인 모양의 조형물이 보였지만, 워낙 다가가기 어려운 곳이었기에 그냥 지나쳤던 기억이 난다.
 몇 달 전, 대학기록관장으로 계시는 정우락 교수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대뜸 장윤덕 의사를 아느냐고 물으셨는데, 너무나도 낯선 이름이었기에 모른다는 궁색한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장윤덕 의사는 지금껏 무심코 지나쳤던 조형물의 주인공이었다. 매일 학교를 오가면서 그 옆을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조형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센트럴 파크로 발걸음을 옮겼다. 관심을 갖고 바라본 조형물에는 ‘장윤덕 의사 순국기념비’라는 10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장윤덕 의사 순국기념비는, 정문에서 150m 정도 이동하면 볼 수 있는데, 기념비 앞에 세워진 안내문에 따르면, 높이 3m의 현충시설이라고 한다. 『알기 쉬운 보훈행정용어집』에서는 현충시설을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건축물, 조형물, 사적지 등으로, 국민의 애국심 함양에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곳’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장윤덕 의사는 대체 어떠한 업적을 남겼기에 기념비가 세워지게 된 것일까? 비문에 새겨진 내용과 국가보훈처 및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등에서 편찬한 여러 자료들을 토대로, 장윤덕 의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장윤덕 의사는 경상북도 예천군 출신으로,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원숙(元淑), 호는 성암(惺菴)이다. 1872년 7월 6일에 태어나서 1907년 9월 16일에 돌아가셨으니, 우리나라가 극심한 혼란을 겪었던 근대전환기에 활동하신 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였던 그는, 일찍이 한학(漢學)을 공부하여 예천군의 수서기(首書記)가 되었으나, 무력을 앞세운 일제의 침략 야욕을 목도하고서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 항일 구국 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1907년 4월에는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매국적신(賣國賊臣)들을 처단하고자 서울로 올라갔는데, 중간에 배신자의 밀고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7월에는 각지에 격문을 돌려 3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였으며, 9월에는 이강년(李康年) 휘하의 의병장으로서 풍기, 봉화, 문경, 용궁, 예천 등지에서 일경과 교전을 벌이는 한편, 친일반역자를 사살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특히 9월 10일에 있었던 갈평전투(葛坪戰鬪)에서는 이강년, 민긍호(閔肯鎬) 등과 합세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니, 이로 인해 일본 토벌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1907년 9월 16일, 대구수비대(大邱守備隊)를 격파할 목적으로 상주읍을 습격하다가 불행히도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붙잡히게 된다. 이때 일본군이 의병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혹독한 고문을 자행하였으나, 장윤덕 의사는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의거하였는데 너희 강도들을 몰아내지 못하고 붙잡혔으니, 오직 죽음을 바랄 뿐이다. 너희들과는 아무 말도 하기가 싫다.”라 하며, 앞니로 스스로 혀를 끊어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상주시 함창읍 구향리의 뒷산에서 일본군에게 총살형을 당하여 순국하였으니, 향년 35세였다. 
 장윤덕 의사의 순국 이후, 일제는 그의 가족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쳤다. 대구수비대의 습격으로 본가가 모조리 불탔으며, 부인 김함녕(金咸寧) 여사는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산골짜기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제는 끈질긴 추적을 계속하여 결국 남은 가족들 역시 사로잡히게 되었으니, 당시 장윤덕 의사의 장남 장시환(張時煥)은 일본인 사업가에게 넘겨져 6년 동안이나 일본에 억류되었다고 한다. 새삼 모골이 송연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장윤덕 의사에게는 대통령 표창(1963)과 건국 훈장 독립장(1968)이 추서되었으며, 장윤덕 의사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1965년 10월 30일에 순국기념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우리 학교에 이 기념비가 세워지게 된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2010년 3월 4일자 『매일신문』의 사회면에는 <“일단 만들고 보자” 번지수 잘못 찾은 기념비들>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는데, 요지는 장윤덕 의사 순국기념비가 우리 학교에 있어야 할 합당한 이유가 없으며, 학교 측에서도 이에 대한 이전을 검토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윤덕 의사 순국기념비가 우리 학교에 세워진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듯하다. 이는 비문의 내용을 통해 대략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비문의 마지막 문단에 “나라의 기둥 될 준재들이 모인 이곳 경북대학교 뜰에, 드높이 돌을 세우고 의로운 사적을 새겨 이 땅의 젊은 학도들에게 길이 전하니, 후진들은 명심할지어다.”라는 말이 적혀져 있기 때문이다. 특정 인물과 관련된 기념비는 일반적으로 그 인물의 연고지에 세워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장윤덕 의사 순국기념비와 같은 현충시설의 경우, 국민의 애국심 함양을 목적으로 조성된 것이므로, 유동인구가 많은 곳, 특히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닿기 쉬운 곳에 세우는 것이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더욱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편, 이 기념비에 새겨진 비문은 배학보(裵鶴甫) 선생이 지었고, 기념비의 이름자 글씨는 장윤강 선생이 썼다. 배학보 선생은 대구사범학교에 재학하던 중 독립운동을 위해 동지들과 함께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였다가 체포된 분이고, 장윤강 선생은 장윤덕 의사의 아우이다. 선배 독립운동가를 위해 비문을 지은 배학보 선생과, 앞서간 형을 그리워하며 기념비의 이름자 글씨를 쓴 장윤강 선생을 떠올려 보면, 절로 코끝이 시큰해진다.
 십수 년 전에 비하면, 장윤덕 의사 순국기념비로의 접근이 한층 수월해졌다. 그러나 불과 얼마 전의 필자처럼, 아직도 우리 학교의 많은 구성원들이 이 기념비의 존재를 모르고 있으리라. 오늘은 잠시 시간을 내어 장윤덕 의사 순국기념비까지 산책을 해 보자. 그곳에서 3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 장윤덕 의사를 떠올리며, 이 기념비가 이곳에 세워진 이유를 다시금 되새겨 보면 좋을 것 같다.


▲장윤덕 의사 순국기념비(측면)


▲장윤덕 의사 순국기념비(전면)


▲장윤덕 의사 순국기념비 비문


황명환 강사
(인문대 국어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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