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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기록관-우리가 몰랐던 경북대 이야기

35.사범대학, 새봄, 그리고 백신애

여기까지는 우리가 잘 아는 사범대학 이야기
사범대학은 1923년 4월 「경상북도공립사범학교」로 출범했다. 1910년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일본은 조선에 사범학교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더 많은 일본인들을 교사로 초빙하기 시작했다. 삼일운동 후 높아지는 근대식 학교교육에 대한 열망은 이내 교사부족 현상을 불러왔다. 그 결과 1922년에 관립 경성사범학교를 필두로 1923년부터 각 지역마다 공립사범학교 설립이 허가되었고, 대구에도 1923년 4월 경상북도공립사범학교가 개교했다. 그리고 1929년, 조선총독부는 다시 사범학교 정책을 바꾸어 지역의 공립사범학교를 모두 없애기로 했다. 대신 관립학교였던 경성사범학교와 함께 평양과 대구에만 관립사범학교를 남겨두었다. 경상북도공립사범학교는 5년제 중등학교인 관립 대구사범학교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각 지역에 있던 사범학교들을 폐교시켰으니, 닥쳐올 교사부족 현상은 명약관화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다시 지역마다 관립사범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고, 해방 직전에 경성(1943년), 평양, 대구(1944년)의 사범학교는 다른 사범학교와 달리 오늘날 고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대구가 교육도시라는 이미지가 생긴 것도 일제시기에 경성과 평양, 대구에만 다른 지역에 없는 관립학교나 전문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해방. 1946년 대구사범학교는 국립 대구사범대학으로 승격했고, 1951년 국립경북대학교가 설립인가를 받으면서 1952년 대구사범대학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이 되었다. 올해 2022년은 1923년 사범학교 설립 후 100년이 되는 해이다. 초등교사 양성기관이었던 사범학교를 중등교사 양성기관인 사범대학의 전신이라 할 수 있을지,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관공립사범학교를 해방 후 사범대학과 같은 학교라 논할 수 있을지 논쟁도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자. 

새봄, 새로 보는 사범대학 이야기를 시작하다
새봄이다. 만개했던 벚꽃이 흩날리고 온갖 꽃들이 만발하는 새봄. 새로 보는 봄이다. 누구나 잘 아는 사범대학 말고, 사범대학 이야기를 새로 보자. 그동안 잘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해 보자. 이야기의 출발은 1906년 3월 봄. 이해 대구에는 경상북도 관찰사 신태휴를 비롯한 발기인 20명과 지역인들 60여 명이 돈을 내고 대구지역 계몽운동단체였던 광문사가 함께 힘을 합쳐 「대구사범학교」를 세웠다. 전국이 애국계몽의 기치 아래 민간학교 설립운동으로 들끓고 있었고, 제일 먼저 새로운 교과를 가르칠 새로운 교사 양성이 필요한 때였다. 아직 통감부의 규제가 민간사범학교에까지 닿지 않았던 때라, 대구사범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서상돈, 서병오, 이장희 등을 포함한 발기인 20명은 당시 거금이었던 500원을 내기로 했는데, 그중에는 이일우도 있었다. 이일우는 1만여 권의 장서를 갖춘 도서관이자 교육기관이었던 우현서루를 운영했던 유명인물로, 우현서루의 책 중 일부가 현재 경북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짧은 봄처럼 대구사범학교도 그해 10월 일본 군인들의 거처로 수용당하면서 끝이 나버렸다. 1906년 사립대구사범학교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과 연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의 사범학교가 왜 관공립이었는지, 경북대 사범대가 어떻게 오늘날 국립이 되었는지 짐작케 해준다. 
또 다른 이야기 하나를 하자면, 관공립사범학교의 규율이다. 대구사범학교가 학비면제와 졸업 후 즉시 취업이 보장되는 학교인지라 시험성적이 높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학교였다. 더구나 1929년부터 몇 해 동안 전국에 3개밖에 없는 관립사범학교였고 나중엔 전문학교로 승격까지 했으니 더욱 명문학교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일제가 관립사범학교의 규율을 매우 강화하여 학생들을 철저한 황국신민을 만들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총독부가 직접 틀어쥐고 교육하지 않고 민간에 사범학교를 맡겼다가는 장차 어떤 교사가 나올지 우려스러웠던 것이다. 규율이 워낙 세니까 학생들은 사범학교를 들어가면 반 죽는다는 의미로 ‘死半’학교(이는 사범학교의 일본어 발음과 같다)라 불렀다. 규율이 제아무리 세도 학생들은 조선의 독립을 희망했고, 이 때문에 대구사범학교에서 몇 건의 독서회사건, 비밀결사사건이 터졌고 일제에 검거당해 옥사한 희생자들도 발생했다. 

매력적인 작가 백신애, 제1회 입학생이자 졸업생
사범대학의 마지막 새로운 이야기 하나를 이어가 보자. 그 키워드는 “백신애(白信愛)”이다. 그녀의 작품이 교과서에도 실렸던지라 지금은 꽤 알려진 인물이다. 「꺼래이」, 「적빈」, 「나의 어머니」는 그녀의 유명 작품이다. 1932년 잡지 「삼천리」에서는 백신애를 두고, “글 잘 쓰는 백신애, 말 잘 하는 백신애”라고 했지만, 그녀의 삶은 글과 말에만 그치지 않고 모험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드는 불꽃 같은 삶이었다. “여성에게 해방적 의식”을 교양하기 위해 여성동우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 활동에도 나섰다. 항상 미래를 고대하며 사는 까닭에 무덤마저도 고대한다던 그녀의 맹렬한 활동 때문인지 안타깝게도 1939년 서른을 좀 넘겨 요절했다. 
이런 백신애가 1923년 경상북도공립사범학교가 처음 개교하던 때 강습과에 입학했다. 강습과는 1년 단기과정이었다. 입학 당시 이름은 백술동(白戌東). 흔히 알려진 출생연도 1908년과 달리, 학적부상으로 그녀의 출생연도는 1906년이다. 국어와 음악 공부를 잘 했고, 전체 성적도 썩 좋았다. 1924년 3월에 졸업하자 바로 영천보통학교 교사로 발령받았다. 교사생활도 길지는 못 했다. 여자청년회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권고사직을 당하여 학교를 나와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다. 학교 밖에서 빛나는 이십 대 청춘을 보냈다. 이십 대를 살던 한창 살아가던 1935년 2월, 그녀는 청춘을 이렇게 읊었다. 

“봄이 가버리든, 늙음이 닥쳐오든, 무슨 상관이리요. 즐거운 내일, 희망의 내일, 내 삶의 나무가지에 꽃피는 내일. 그날만이 나에게 고대 될 뿐이다. 이 고대가 참된 나의 청춘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청춘을 굳게 잡고 놓치 않으리라.”


▲대구사범학교(사범대학 전신, 1930년대)


▲사범대학(2007)

이경숙 연구원
(영남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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