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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기록관-우리가 몰랐던 경북대 이야기

38. 1950년대의 경북대학교 생물학과 양인석 교수와 식물학 교재에 대한 추억담

1952년 5월 28일 경북대학교가 산격동에서 개교하였다. 6.25 전쟁 중에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수백만 명의 피난민이 대구와 부산 그리고 그 주변으로 밀려왔다, 낙동강 방어선을 겨우 지키게 되었다. 대구는 다행히 폐허는 면했다. 산격동 일대는 판잣집이 즐비한 피난민촌으로 탈바꿈하였다. 대학 캠퍼스도 미국의 원조물자로 지어진 판잣집 강의실에서 겨우 강의가 진행되는 실정이었다. (사진 1. 1950년대 본관 가건물)
생물학과의 양인석 교수는 식물분류학자로서 제자들과 함께 전국의 산과 들로 자연을 찾아 식물 종의 분포를 조사하고 표본을 채집하여 문헌 자료를 분석하고 신종을 찾는 등 활동을 하였다. 분류학 분야는 값비싼 분석 측정장치 등 설비가 없어도 최소한 연구수행이 가능하여 다행이었다.
생물학은 전공과목을 크게 식물학, 동물학, 미생물학의 세 분야로 나누고 있다. 세 분야의 세분된 전공은 분류학, 형태학, 생리학, 유전학, 생태학, 생화학 등이 있다. 최근에는 특히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 등이 활발한 연구발전을 성취하여 인류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자연과학 분야는 필수적으로 실험실 시설과 측정기기의 설비 등이 필요하지만 재정적 한계로 인해 갖추지 못하여 애로가 많았다. 
1950년대에 대학의 교수진 구성은 국내의 대학들이 모두 역사가 짧아 배출한 인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다수의 교수는 일본 등의 대학이나 전문대학에서 수학한 인재들로 구성되었다. 문리과대학 생물학과에 교수 8명과 사범대학 생물과에 교수 5명이 재직하였으나 1950년대 말까지 대학원 연구 과정을 거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다른 학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며 서울대학교를 비롯하여 전국의 대학에서도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에는 전쟁 폐허로부터 복구와 재건에 힘쓰며 많은 인재가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 선진국의 대학으로 유학하여 정상적인 연구 과정을 이수한 다수의 박사 인재들이 귀국하여 각 대학 교수진에 합류하여 교육과 연구 활동이 질적 양적으로 활발하게 발전되었다.
한편 초창기의 대학 교육과 연구 활동에 꼭 필요한 중요한 문헌 자료의 부족은 큰 애로점이었다. 생물학 분야는 국내에 연구자가 극소수이고 충분한 연구업적이 축적되지 않아 문헌 자료가 없어 외국의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에 대학의 전공 분야에 관한 문헌 자료는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구하였다 하여도 그것을 복제 활용하려면 스스로 펜으로 베껴 쓰는 방법밖에 없었다. 당시의 대학교수들은 외국의 문헌, 주로 일본의 전문 서적을 구하여 번역하여 강의에 활용하고 학생들을 위한 교재로 제공하였다. 전공과목 중에는 교수에 따라서 일본의 서적을 번역하여 만든 노트에 의해 교수가 읽어주는 교재 내용을 학생들이 노트에 받아쓰기하는 형식으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양인석 교수가 전공과목 교재용으로 만든 번역판 인쇄물은 학생들에게 매우 소중한 교재 및 문헌 자료가 되었다. 1954년에 저술한 植物學(상)은 형태학 편이며 세포학, 조직학 및 기관학으로 구성되고(131쪽), 植物學(속편)은 생리학 편으로 영양학을 내용(46쪽)으로 구성되었다. (사진 2. 식물학 (상)과 (속편)의 표지)
교재의 제작 방법은 필경사가 <가리방>을 이용하여 철필로 원고 내용을 원지에 긁어서 등사기(謄寫機)로 복사물을 만드는 노력과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가리방은 밀랍이나 왁스가 코팅된 반투명의 등사원지를 철필로 긁을 때 밑에 받치는 사선 격자무늬의 홈이 새겨진 줄판이다. 등사기는 등사 원고를 고운 비단천으로 된 실크 스크린에 붙이고 밑에 놓인 종이에 밀착시킨 후 그 위로 끈적한 유성 잉크를 묻힌 롤러를 굴리면 철필로 새겨 왁스 코팅이 제거된 등사지 부분은 잉크가 새어 나와 등사지와 비단 스크린을 통과해 종이에 묻어 복사물이 만들어진다. 이처럼 롤러를 밀 때마다 한 장씩 인쇄가 되는데 여러 번 밀면 원지가 마모되어 수 백부 정도 인쇄하면 수명을 다하게 된다. 1960년대에는 한글 타자기를 이용하여 스탠실 등사원지에 타자하여 프린트하였다. 현재는 컴퓨터 프린터 인쇄가 일반화되고 전자복사기기의 발전에 의해 초고속 대량 원색 복사기술이 보급되어 원본과 손색이 없는 교재를 빠르고 값싸게 만들 수 있다. 도서 출판의 경우에는 윤전식 등사기에서 인쇄드럼에 의해 고속으로 인쇄할 수 있다.
양인석(1909.11.26. ~ 2003.11.3.) 교수는 국내 식물분류학의 개척자이자 일찍이 자연보호운동에 앞장선 대구출신의 원로 생물학자이다. 그는 1929년 대구공립농림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서울대 농대의 전신인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울산농업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교육계에 몸담았다. 1945년부터 2년간 대구여상고 교장 그리고 경상북도 학무과장을 지냈으며, 1949년 경북대 농과대학 교수를 시작으로 1954년 문리과대학 생물학과 교수, 도서관장, 문리과대학장, 대학원장 등을 역임하고 1975년 퇴직 때까지 26년간 경북대에 재직하며 대학 교육 향상과 식물분류학의 이론 정립에 헌신해 왔다. 특히 학술 활동으로서 팔공산 휴식년제 도입을 일찌감치 주장하여 생태계보호에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고 희귀종인 세뿔투구꽃 등 신종을 발견하여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또한 대구·경북지역 산악회 조직 및 한국자연보존협회 이사장과 대구·경북지부장을 역임하였으며, 국민훈장 동백장과 모란장에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식물학개론’(1955), ‘생물학개론’(1958), ‘경북식물조사 연구’(1962), ‘양인석박사 송수기념논문집(1969)’, ‘한국식물검색편람’(1986) 등과 교양서로 ‘백화송’, ‘우리 꽃 좋을시고’ 등을 남겼다. 
양인석 교수와 필자의 만남은 학부 시절과 대학원과정 및 일본 유학과 한국자연보존협회의 활동 등 46년간 지속되었다. 필자는 1957년에 사범대학 생물과에 입학하여 학부과정 4년 동안 식물분류학과 약용식물학, 원예식물학 그리고 야외실습을 양인석 교수에게 배웠다. 생물학과의 다양한 전공필수와 선택과목을 이수하고 1961년 2월 졸업하였다.
1965년 초에 일본 사립장학재단이 주관한 제1회 대학원 과정 유학생 선발시험이 있었다. 필자는 식물학 분야에 합격하였다. 양인석 교수의 추천으로 일본 東京大學 대학원 생리생태학 교실에 입학 허가를 받아 출국하였다. 동경대학에서의 연구 생활은 모든 것이 새롭고 하루하루가 기적 같은 새 경험의 연속이었다. 교수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왕성한 연구활동을 수행하고 있는 10여 명의 조교수와 강사, 조수 그리고 Post Dr.를 포함하여 박사과정 석사과정 및 연구생 등 총 20여 명의 연구팀은 당시 IBP(국제생물학사업계획)을 총괄하는 핵심적 역할을 주도하였다. 매주 국내외의 저명 교수들을 초빙하는 세미나와 다양한 학술토의가 연중 계속되었다. 6년간 거의 매일 16시간 정도의 분주한 연구 활동을 거쳐 1972년 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모교에 돌아와 연구와 강의를 하게 되었다. 새로운 식물생리생태학의 연구실을 개설하고 필자의 문하에 모여든 우수한 대학원생과 학부생들을 지도하면서 행복한 연구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지도한 대학원생 중에는 경북대학교 최초의 외국 유학생으로서 박사학위(1985)를 취득한 Mr. A. Huque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양인석 교수와의 만남에서 받은 은혜로서 항상 감사하며 행복한 추억을 즐기고 있다.


▲사진 1. 본관 가건물 사진(1950년대)


▲사진 2. 식물학 (상)과 (속편)의 표지

송승달 명예교수
(자연대 생물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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