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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기획

세 손가락 끝에 담긴 염원, 버마민주화운동

작년 미얀마에서는 군부가 총선의 결과에 불복하며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고문 아웅 산 수 치를 구금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에 군부의 쿠데타로 무너진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민주화운동이 벌어졌다. 미얀마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현재 미얀마에서 일어나는 사태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미얀마의 역사와 분쟁에 대해서 알아보자●



1. 버마민주화운동, 그 뿌리를 찾아서 

버마민주화운동이란 미얀마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에 맞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말한다. 미얀마 시민들은 왜 굳이 ‘버마’라는 명칭을 민주화운동에 붙인 것일까. ‘버마’는 미얀마에서 다수 종족인 버마족을 가리키는 용어이자 미얀마의 옛 국명이다. 1989년 군부가 버마족 외에 다른 소수민족을 전부 아우르는 새로운 명칭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개칭하면서 미얀마라는 국명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민주화운동을 하는 수많은 활동가는 군사 정권이 새롭게 이름을 붙였다는 점에서 미얀마라는 국명에 거부감을 느껴, 현재까지도 버마라는 명칭을 고집하고 있다. 그렇기에 버마민주화운동이라 부르는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버마민주화운동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2월, 새로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시민들이 이에 대응해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이 민주화운동은 일어난 지 어느덧 15개월을 지나고 있지만, 결과의 향방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 게다가 순탄치 않은 민주화운동의 과정 아래에서 무고한 민간인 사상자들은 지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정치범지원협회(AAPP)는 지난 26일을 기준으로 군부 폭력에 의해 숨진 미얀마 국민 수가 1,864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할 정도이다. 이러한 미얀마 내부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얀마 역사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18세기 후반, 버마는 인도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벵골 지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려던 도중,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동쪽으로 세력을 넓혀오던 영국과 충돌한다. 사소하게 시작된 국경 분쟁은 점차 식민지 전쟁으로 변모했고, 최종적으로 패배한 버마는 1886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상황 속 구세주처럼 등장한 인물이 바로 미얀마의 국부, 아웅 산이다.

아웅 산은 영국의 통치를 벗어나 버마의 자치권을 되찾고 싶어 했다. 반영 저항운동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이를 기회로 영국에 직접적인 공격을 감행할 것을 결심한다. 이때 아웅 산이 도움을 얻을 상대로 결정한 국가는 연합군의 상대인 일본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군사적 요충지로서 훌륭한 버마 땅을 탐내기 시작하자, 계획을 바꿔 영국과 손을 잡아 일본군을 격퇴한다. 그 후 1947년 아웅 산은 영국 정부와의 담판 끝에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 실시 등의 합의문 조항을 만들어 버마의 독립을 보장는 약속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그해 7월 익명의 저격병에게 살해당하면서 결국 1948년의 공식적인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숨졌다.

타 국가의 지배가 떠난 미얀마는 겉으로는 건재해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버마의 독립과 단합의 구심점이던 아웅 산이 피살되면서 내부 분열은 심화됐고, 소수민족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문제에만 집중한 것이다. 이렇게 국가 내부가 혼잡하던 시기 조용히 힘을 키우던 네 윈 군부는 1962년 3월, 첫 번째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다.

정권을 장악한 네 윈은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쇄국 정치를 시작했다. 대부분의 경제 주체들을 국유화해 폐쇄적인 경제를 운영하며 소수민족과 외국인은 탄압하는 고립 정책을 펼쳤다. 심지어 군부 일당제를 실시해 자신들끼리 돌아가며 권력을 차지했다.

군부의 억압은 날로 심해지고 경제는 최악의 수준에 접어들자, 시민들은 반군부 시위를 일으키기에 이른다. 그동안 억눌렸던 시민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1988년 8월 8일에 일어난 해당 시위는 ‘8888항쟁’이라고도 불린다. 군부는 이를 진압하려 시민 학살을 자행하는 등 온갖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이에 소 마웅 장군이 군부 내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며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다. 이것이 미얀마의 두 번째 군부 쿠데타이다. 정권을 장악한 소 마웅 군부는 처음엔 시민들의 요구를 잘 수용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새로운 결정 기관인 국가평화발전평의회(SLORC)를 구성하고, 이듬해 국회 선거를 계획한 것이다. 하지만 선거 결과 아웅 산의 딸인 아웅 산 수 치가 이끄는 국민민주연맹(NLD)이 전체 의석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대승리를 거두자 군부는 이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2011년까지 독재한다.

한편, 2008년 군부는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한다. 군부는 총선 결과와 상관없이 상·하원 의석 중 25%를 미리 배석한다는 조항을 만든 것이다. 또한 비상사태 시에는 군 총사령관에게 모든 권력이 인계된다는 조항도 만들어서 법으로 명시했다. 해당 조항은 후일 세 번째 쿠데타를 일으키는 법적 근거가 됐다.

오랜 독재로 국제사회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되자, 군부는 부분적인 민주화를 계획한다. 2010년 총선을 부활시킨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군부의 지원을 받는 통합단결발전당(USDP)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는 것이다. 이를 향한 수많은 의혹 제기에도 군부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결국 무의미한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이후 2015년 11월 또다시 총선이 열렸다. 1990년 이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시행된 선거인 해당 총선에서는 국민민주연맹이 또 한 번 승리를 거둔다. 이때 국민민주연맹은 지난 2008년 군부가 개정한 불합리한 법 조항을 고치려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군부에게 미리 배석된 25%의 의석이 문제였다. 총 75% 이상이 동의해야만 개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2020년에 이루어진 총선에서도 국민민주연맹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참담한 결과에 위협을 느낀 군부는 결국 선거 결과에 불복한다. 그리고 2021년 2월 1일, 민 아웅 흘라잉 장군이 부정 선거를 척결한다는 이유로 비상사태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세 번째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군부가 부정 선거의 내막을 조사한다는 이유로 아웅 산 수 치를 포함한 내각의 주요 인물들을 강제 구금하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다시 한 번 민주화운동을 일으켰다.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2021 버마민주화운동이다.


2. 버마 민주화의 또 다른 난관

버마의 민주화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문제는 군부만이 아니다. 전체 인구 중 약 68%를 차지하는 다수민족 버마족과 그 외 수많은 소수민족 간에서 발생하는 갈등 역시 하나의 난관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해결되지 못한 채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 민족 분쟁은 현재 민주화운동의 성패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얀마에서 소수민족 문제가 두드러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그 해답의 실마리는 앞서 살펴본 영국에 의한 식민 지배 시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영국 정부는 버마라는 새로운 국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모호하던 영토 경계를 명확히 확정했다. 이 과정에서 국경지대에서 살아가는 소수민족들이 하루아침에 버마라는 국가의 시민으로 편입된 것이다. 

게다가 당시 영국 정부는 지배를 효율적으로 하고자 버마에 분할통치라는 지배원리를 적용하면서 민족 간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버마족은 관료제도와 성문법을 통한 식민지 정부의 직접통치권에 뒀지만, 소수민족의 경우 전통적인 지배원리를 일부 인정하는 간접통치를 시행한 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도 소수민족의 거주 지역에 대해서만 영국 관료에 의해 통치되거나 별도로 분리된 자신들의 선거구를 인정해줬다. 버마족만 정치 영역에서 철저하게 배제한 것이다. 이는 다수민족 버마족의 세력을 약화함으로써 식민지 지배를 더욱 원활하게 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됐다.

버마족과 소수민족 간 갈등은 제2차 세계대전에 접어들면서 더욱 심각해진다. 당시 버마족의 아웅 산은 반영 저항운동을 위해 일본의 도움을 얻었다. 이처럼 버마족이 일본과 연합한 한편, 소수민족은 상반된 길을 걷게 된다. 이들은 영국 정부로부터 독립을 약속받고 연합군으로 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하지만 버마족이 입장을 바꿔 영국과 연합하고 승리하게 되면서, 영국과 소수민족 간의 합의는 없던 일이 됐다.

이후 소수민족의 자치권에 관해 결정하는 자리는 다시 마련된다. 1947년의 삥롱 회담이 그것이다. 당시 아웅 산과 소수민족 대표단은 회의 끝에 소수민족에 대한 자치권을 보장하는 연방제로 미얀마를 수립하되, 10년 후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소수민족의 미얀마 잔류 여부를 선택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하지만 해당 협정에는 거대 소수민족 중 하나인 카렌족을 포함해 다수의 민족이 참여하지 않았을뿐더러 아웅 산의 피살로 인해 이행 여부 역시 미궁으로 빠지게 됐다.

이후 네 윈 군부의 소수민족에 대한 과도한 억압은 분노를 고조시켰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폭력적인 군부에 맞서 각 소수민족은 무장단체를 조직했지만, 이는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친군부 혹은 반군부의 진영으로 분화되거나 버마족과 소수민족 간 분열이 심화돼 갈등의 구조는 더욱 복잡해졌다. 무력의 표출 대상이 제각각 달라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번지면서 주로 버마족으로 구성된 민주주의 진영이 강한 무력을 갖춘 군부와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되자, 소수민족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그들이 갖춘 무장단체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해진 것이다. 또한 경제적으로 중요한 자원이 풍부한 곳에 소수민족이 자리하고 있는 만큼 이들이 민주주의 진영에 가담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소수민족과의 연합 성사까지는 많은 난관들이 존재한다. 아웅 산 수 치가 민주화를 염원하면서도 소수민족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내보인 것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그녀는 군부의 로힝야족 대학살에 대해서도 오히려 군부를 옹호하는 듯한 자세를 취해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민주화와 소수민족 분쟁 문제를 별개의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미얀마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버마족의 상황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소수민족 분쟁 문제에 대한 깊은 고찰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3. 국제사회에 남겨진 숙제

미얀마에서 거센 민주화운동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국제사회의 관심은 크지 않다. 네 윈 군부의 쇄국 정책으로 오랜 시간 베일에 싸여있던 국가였기에 현지 정보가 상당히 부족할뿐더러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부분의 이목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의 완전한 쟁취를 위해서는 단순 현지 시민사회의 운동과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국제사회에서 반인륜적인 유혈 진압을 자행하는 군부에 대한 비판과 민주화운동의 주체인 미얀마 시민들을 향한 응원을 보내는 역시 큰 힘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관심을 끌기 위해 실제 전선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활동가들은 타국을 오가며 미얀마의 실상을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최근 이런 노력의 일환이 본교 캠퍼스에서도 이루어졌다.

지난 25일 본교 인문학술원의 주관으로 개최된 제10차 인문포럼이 ‘버마의 민주화운동과 버마학생민주전선’을 주제로 진행됐다. 포럼은 본교 인문한국진흥관 B103호에서 열렸으며 온라인으로도 동시 중계됐다. 이번 포럼을 주관한 본교 인문학술원의 원장인 윤재석 교수(인문대 사학)는 “민주화 과정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버마의 행적들을 대한민국에서도 그간 겪어온 만큼 우리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소통을 하는 게 동시대인들 최소한의 양심이라 생각한다”며 “이번 강연을 통해 우리가 다시 한 번 ‘민주화’라고 하는 인류의 보편적 진리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에서의 고통과 더불어 그 소중함이 어떤 것인지 되새겨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군부를 상대로 무장 항쟁을 주도한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All 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의 탄 케 의장이 강연을 진행했다. 그는 “1980년 광주에서 민주화를 위해 한국 학생과 시민이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을 봤다”며 “당시 학생이었던 저는 외국 뉴스를 보고 한국 시민이 독재에 저항하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고 포문을 열었다. 이어 “현재 버마에서 1988년 이후 30여 년만인 지난해 2월 군부 쿠데타로 또다시 민주화운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실상을 전했다.

그리고 2021년 버마민주화운동을 8888항쟁과 비교해볼 때 주목할 만한 점 세 가지를 짚었다. 첫째는 휴대전화와 같은 통신 수단이 등장하면서 미얀마의 실상이 외부에 더 잘 알려지게 된 점이다. 이로 인해 국제적 소통창구가 강화되면서 국제사회의 압박이 더욱 강해졌다고 설명했다. 둘째는 활발하게 일어나는 시민불복종운동(CDM)이다. 현재 시민불복종위원회(CDC)와 총파업위원회(GSM)을 기반으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이 많으며, 일부 소수민족도 항쟁의 움직임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의회의 존재라고 말했다. 1988년 당시에는 시민들의 의사를 대표하는 의회 자체가 없었던 반면, 지금은 지난해 선출된 연방의회대표위원회(CRPH)가 존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민족통합정부(NUG)를 구성하고 학생과 시민이 항쟁을 벌이고 있지만 여러 소수민족이 존재하는 등 협의하기 어려운 요인들이 있는 데다, 군부는 민주화를 원하는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있다”고 고충을 전하며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했다.

거칠고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는 버마민주화운동은 예전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많은 부분이 닮아있다.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군부는 고립된 시민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고, 목숨을 위협하는 무력 행사에도 시민들은 그저 민주주의를 외치며 묵묵히 나아갈 뿐이다. 하지만 버마민주화운동은 어느새 15개월에 접어들었음에도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이다. 희망에만 의지해 버티기엔 힘이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지난 80년 5월 18일 광주에서의 민주화운동 당시, 민주화를 향한 우리의 처절한 외침을 국제사회에서 주목한다는 점이 큰 도움이 됐던 것을 분명히 기억할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받았던 연대와 지지를 그들에게 전해야 할 때이다. 긴 하루 일과 중 5분이라도 그들의 실상과 행보에 관심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 버마학생민주전선 탄 케 의장이 본교에서 열린 버마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포럼에서 강연하고 있다.


정다은 기자 jde20@knu.ac.kr

편집 조현진 기자 jhj20@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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