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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기록관-우리가 몰랐던 경북대 이야기

41. 경북대 상주캠퍼스의 숨겨진 이야기

얼마 전에 경북대신문사에서 ‘우리가 몰랐던 경북대 이야기’라는 기획 기사 원고를 청탁했다. 경북대와 상주대가 통합된 지도 벌써 14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의 이야기를 드릴까 한다.

경북대 대구캠퍼스에서 근무하는 교직원들에게는 상주가 낯선 곳인지도 모른다. 옛 읍성국가시절에 상주에는 ‘사벌국’과 ‘고령가야국’이 있었고, 신라와 조선 때에는 전국 8목(牧)의 하나였으며, 「경상도」라는 지명이 경주와 상주에서 유래했을 정도로 큰 고을이었다. 특히 조선 초기인 태종 7년부터 186년간 경상도를 관할하는 「경상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있었던 대구의 경상감영만을 기억하고 있다.

상주는 두 가지 정신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하나는 임진왜란 이후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는 주민들을 구휼하기 위하여 상주의 13개 문중이 뜻을 모아서 조선 최초의 사설의료기관인 「존애원」을 설립하였다. 서양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정신이 조선시대에 처음 꽃을 피운 곳이 상주이며, 지금도 상주 정신은 존애원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또 하나는, 고려시대부터 성리학이 꽃피었던 곳이 상주이며, 조선시대에 와서 영남지방 유림은 퇴계의 성리학 일색이었지만, 상주는 양명학이 이 성리학과 함께 했던 화합의 지역이었다. 그 증표로 상주 유림에서는 사액서원인 도남서원에 퇴계학파의 서애 류성룡 선생과 양명학파의 소재 노수신 선생을 나란히 배향하고 있다. 이렇듯 학문을 사랑하는 탓으로 대설위 상주향교와 사액서원인 도남서원, 흥암서원, 옥동서원이 흥학에 앞장서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상주대학교의 전신은 일제 강점기인 1921년 4월 25일에 세워진 공립「상주농잠학교」이다. 당시 일제는 조선의 잠업을 양성하기 위해 누에의 병과 병충해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잠업령」을 공포했는데 「상주농잠학교」는 이 법을 기초로 세워진 학교였다. 또한 이 학교가 상주에 자리 잡은 것은 조선시대부터 잠업이 가장 번성했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상주농잠학교」는 전국에서 인재들이 모여드는 명문 학교로 발돋움하였다. 

그 후에 학제변경을 거듭하면서, 1977년에는 국립으로 이관되고, 「상주농잠전문대학」으로 승격하였다. 1980년에는 <가장동 캠퍼스>로 이전 승인을 받아서 34만 평의 대지 위에 캠퍼스를 조성하여 1991년에 완전히 이전하였고, 1993년에는 다시 개방대학체제의 4년제 「상주산업대학교」로 승격하고, 석사과정 대학원과 4개 학부, 19개 학과로 출발하였다.

이렇게 4년제 「산업대학교」로 발전한 배경은 구미공단에 근무하고 있는 기술 인력의 재교육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전국 6개의 산업대학교에 학사과정의 야간부를 승인해서 산업체 기술 인력들이 ‘주경야독’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 당시 「상주산업대학교」는 주야간 학생정원이 5,080명이었으며, 특히 야간부 때문에 캠퍼스에 늦도록 불이 환하게 밝혀져서 34만 평 상주산업대 캠퍼스가 면학에 열중하는 상주의 자랑스러운 야경명소로도 알려졌다. 

1998년에는 다시 「국립상주대학교」로 개편해 「산업대학 체제」가 아닌 「일반대학 체제」로 바꾸는 노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앙도서관’과 ‘대학 본부’ 건물이 없어서 일반 강의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필자가 상주대학교 직선초대 총장이었기 때문에 이 일에 매진하기로 하고 서울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먼저 문교부가 건축비 130억 원에 난색을 보였고, 경제기획원에서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래도 또 올라가고 또 올라가서 설득했다. 출향인과 선배 동창들도 도와서 예산을 확보하였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고마웠다. 지금도 상주캠퍼스의 중앙에 서 있는 이 건물들을 보면 새삼스러운 생각이 난다.

그리고 전임교수의 비율이 턱없이 낮은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총무처를 드나들었다. 과거 총무처장관을 지냈던 고향 선배가 많이 도와주어 교수 53명을 채용할 수 있었다. 모두 예산 확보보다 어려운 일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필리핀의 뱅퀴드주립대학교, 카자흐스탄의 딸디코르간주립대학교, 미국의 볼스테이대학교와 인카네이드 워드대학교, 중국의 북경임업대학교와 치치하르 대학교들과 자매결연을 하면서 대학의 외연도 넓혔다.

이처럼 상주대가 짧은 연륜이었지만, 이어 3대 김기탁 총장도, 4대 김종호 총장도 전력을 다하여 상주대학교를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렇게 4년제 대학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던 「국립상주대학교」가 4대 김종호 총장 때에 암초에 부닥쳤다. 학생 수 감소로 인한 학생정원조정이 불가피하다며 정부가 대학 간의 통폐합을 추진하고 나선 것이다. 홀로서기를 염원하던 상주대학교로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상주 캠퍼스의 내부가 갈등에 휩싸였다. 대학지원자가 줄어드는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상주대보다는 경쟁력이 훨씬 높은 경북대가 유리하다는 총론에는 모두가 공감하는 사실이나, 통합 반대 교수들은 실제로 학과 통합시의 주도권 다툼과 교수들의 학습권 재분배 문제 등이 심각하게 벌어질 수 있으니, 각자가 더 노력해서 상주대가 독자적으로 가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 통합을 반대하는 원로교수들의 의견이었다. 심지어 원로교수들은 셋방살이의 서러움을 빗대어 통합에 찬성하는 젊은 교수들을 설득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2006년 12월에 총장선거를 하였다. 7명 후보자의 1차 투표 결과, 가장 강하게 경북대와의 통합을 주장했던 추태귀 교수가 제5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제5대 총장은 선거 과정에서 약속이라며 곧바로 경북대 노동일 총장을 방문하고 양 대학 간의 통합을 공식 제안하였고, 경북대가 이에 화답하자, 학내의 갈등은 더 증폭되고, 동창회와 지역의 각종 단체가 ‘통합반대’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학 본부에서는 각계의 인사들로 ‘대학발전위원회’를 구성하고, 통합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을 해결한다고 하며 10개의 통합이행방안을 내걸고 반발을 무마하였다.  

그리하여 2008년 2월 29일에 경북대학교와 통합을 완료한 상주대학교는 87년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상주대학교 교기 하강식’을 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2008년 3월 3일 경북대학교 통합 출범식을 가졌다.

지금도 양 대학의 통합이 성공한 것인가 아니면 실패한 것인가는 후일에 교육전문가들이 판단할 일이지만, 상주가 고향이고, 모교에서 직선초대총장까지 역임한 입장에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양 대학이 어려운 과정을 거친 만큼 오직 성공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상주공립농잠학교 본관(1934년)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 통합출범 제막식(2008년)


김철수 상주문화원장

(전 상주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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