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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경북대신문이 우리에게 남긴 흔적

"20대의 내 인생의 황금기, 화양연화" 

2학기 개강을 앞두고 각종 회의나 워크숍이 이어지고 있다. 전면 대면 수업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내가 있는 대학에서는 40%의 학생이 교실 수업을 처음 듣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이 가져온 경험해보지 못했던 풍경이다. 80년대에 대학을 입학했던 사람들이 겪었던 것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에 이른다. 80년대 대학이라는 공간은 고등학교 때까지 꿈꾸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21세기 어느 날에 80년대를 바라보는 일은 낯설고 이질적이다. 빛이 바랜 기억의 뒤안길을 돌아보면, 당시의 일상에서 떠올리는 것은 최루가스, 광장의 함성, 막걸리와 깍두기, 이념 서적, 펜과 수첩, 전투경찰, 수업 거부와 재시 등등이다. 기억의 뒷골목 풍경으로 자리 잡은 20대 대학 시절은 세월의 먼지 속에 묻혔지만, 그것들은 아직도, 여전히, 때때로 아지랑이처럼 아련하게, 때로는 칼날처럼 아프게 살아있는 기억이다.

낭만을 꿈꾸며 발을 들인 캠퍼스였지만 20살 청춘들에게 일상 곳곳은 혼돈이었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보다 시대의 고민을 안고 살아야 했던 20대였다. 강의실이나 도서관보다 광장과 거리에서 보낸 시간이 적지 않았다. 전망 부재의 현실 앞에서 열정과 분노가 분출됐고, 때로는 연민과 혼돈이 일상을 채웠다. 안개가 걷히지 않은 나의 대학 생활에 예상치 못하게 불쑥 찾아든 것이 경북대신문사 기자 생활이었다.

당시 대학에서 간행되던 신문은 대안언론으로서의 성격도 있었다. 일간지의 기자가 방송국 피디보다 더 선호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언론고시라는 말이 있었듯, 기자 되기가 쉽지 않았고 희소성도 있었다. 전국의 대학에서 발행되던 신문(또는 학보)도 언론의 한 축을 담당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검열이 존재하던 시절에 그런 입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것이 대학 신문이었다. 그만큼 존재감도 적지 않았다.

대학 신문사 기자에게 소위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조화는 늘 고민과 갈등의 뿌리였다. 매주 데드라인 앞에서 늘 긴장하고 때로는 좌절하고 때때로 성취감을 경험했다. 수습 기간은 50대에 접어든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로 기억된다. 몸도 맘도 고된 시기였다. 암담한 좌절이 지속되었지만, 동기들과 끈끈한 정이 힘이 되었다. 가장 큰 성장을 했던 시기이자 삶의 깨달음을 얻어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웃들이 잠의 늪에 잠겨있을 때/ 시대의 가시관을 홀로 이고 섰는/ 신날 것 없는 이웃들의 굿판에서도/ 7월의 바다로 일깨울 줄 아는/ 기름과 먼지와 침묵으로 이루어진/ 금빛 올실을/ 아무도 보지 않는 우주 이쪽에서/ 홀로 짜고 있는” (권기호 부분. 경북대신문 928, 19831114) 어느덧 이런 기자의 삶이 일상이 되고 있었다. 1952년 첫발을 내디딘 이후 지켜온 모습이기도 하다.

경북대신문의 기자로 보낸 시간은 자유에 눈뜨게 했고, 그것의 가치를 깨닫게 했고, 그것을 지킬 용기를 주었다. 어딘가에 갇히지 않게, 한곳에 머물지 않게, 남을 외면하지 않게 해 주었다. 취재하러 만났던 사람, 거닐었던 광장과 골목 풍경, 쓰기 위해 읽었던 책들, 활자로 찍혀 나온 나의 원고, 우리의 기사를 읽던 독자, 이런 것이 일상이었고 어쩌면 세상이 바뀌는 것에 한 점을 보탠다는 위안이었다.

지금 공부하고 가르치고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살고 있다. 글을 쓰는 시간에 문득문득 생각하게 된다. 내가 글을 쓰는 노하우의 팔 할은 경북대신문사 기자 시절의 경험 덕이라는 믿음이 있다. 학부 3학년 기자 생활을 마치고 4학년 학과 수업을 들을 때 알게 되었다. 보고서 쓸 때 자료를 찾고 개요를 작성하고 문단을 배열하는 과정에서 한결 수월하게 완성도 높게 문서 작업을 하는 내공이 생겼음을 발견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삶에 임하는 자세 등을 생각해보면, 20대 내 인생의 황금기에 가장 큰 마디가 되었던 것이 신문사와의 인연이었다. 그 시기를 화양연화라 한다면, 가장 아름다운 시기 제일 중요한 자리 신문사 경험이 되겠다. 기자의 길은 선택한 것이지만, 그 자리는 선택의 결과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운명처럼 어쩌면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처럼 그렇게 자리한 시간이었다.

- 지현배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 교수(87학번 특집부장)-


"내가 나를 알아가는 시간”

호기심에서 들어간 나의 신문사 활동은 꽤 신선했으며 또 꽤 혼란스러웠다. 고등학생 티를 채 벗지 못한 나는 또래 동기들보다 한 살이 더 어렸고 고향을 떠나 시작하게 된 타지 생활은 모든 것이 너무 생경하다 못해 혼비백산 지경이었다. 거기에 더해 신문사에서 일주일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데드라인은 마치 내 꽁무니에 7일간 타임 세팅된 다이너마이트를 달고 다니는 듯했다. 월요일 편집회의를 시작으로 이 다이너마이트에 불이 댕겨지면 우리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취재진을 발굴하고 만나고 글을 써야 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어느 선배가 데드라인의 뜻을 정의 내려주던 날. ‘죽음의 선’. 오싹했다.

95년 입사 당시에는 신문사 내에서 자체적으로 신문을 제작할 수 있는 설비가 없었다. 그래서 보통 금요일은 신문사에서 밤을 새워서 원고 마감을 했고 다음 날 토요일이면 영남일보로 부랴부랴 달려갔다. 영남일보에서 허락한 한정된 시간에 오탈자 교정 편집을 끝내야 했으므로 혹시 시간을 넘겨 교정을 몇 개라도 더 할라치면 아쉬운 소리 하기가 이만저만 눈치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눈치 반 아쉬움 반이 뒤범벅이 된 교정편집 시간이 끝나면 드디어 우리들은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홀가분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근처 중국집으로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

다음 해 신문사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전산부가 생겨난 것이다. 이제 우리도 자체적으로 신문 제작이 가능해진 것이다. 정말 획기적인 변화였다. 데드라인에 대한 압박감은 여전했지만, 눈치를 덜 볼 수 있게 되었고, 분위기만 잘 맞추면 가끔은 꾸물거려 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여기에 더해 경북대신문사는 8면에서 12면으로 증면할 정도의 탄탄한 기자 인력과 고문(어드바이저) 역할을 맡은 선배진이 매우 탄탄하게 다져진 시기기도 했다.

물론 그때에도 세대 차이는 있었다. 서태지에게 열광하고 개성을 중요시했던 우리들은 당시 X세대로 불렸고, 앞선 선배 세대보다 정치사회 이슈를 좀 더 가볍고 경쾌하게 접근하기를 원했고, 가끔 그런 접근방식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전반적으로 당시 경북대신문사에서 같이 활동했던 동료 기자들과 선후배 기자들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참 쓸데없는 것들에 너무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생각에 이불킥을 하게 하지만 다들 너무 사랑스러웠고 그 찬란한 나이만큼 치열하게 빛났다.

경북대신문사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개인적으로도 꽤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때의 활동은 내가 나를 알아가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예를 들면, 나는 원래 기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 학보사 생활을 하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기자직에 맞지 않는 인간인지를 깨달았다. 나는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환경을 즐기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신문기자로서의 불규칙한 루틴과 아주 짧은 시간에 생산한 나의 설익은 결과물을 볼 때마다 불만족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다행스러운 나에 대한 발견이었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발견하는 일은 재미있는 작업이다. 나의 경우에는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지점이 어딘가인지를 깨닫게 해준 신문사의 활동이 졸업 후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내가 원치 않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더 큰 쓸모가 있음을 관찰했다. 물론 신문사 활동으로 나쁜 습관이 생긴 것도 있다. 결과물을 빨리 내고자 하는 조급증이 그러했다. 나중에 이 습관이 있음을 깨닫고 고치느라 정말 애를 많이 먹었다.

마당발 성격이 아닌 나 같은 인간도 캠퍼스에 아는 얼굴들로 넘쳐나게 했던 신문사 활동이었다. 신문사 사무실이 있는 북문에서 경영학과가 있는 동문까지 걸어 다니기를 얼마나 많이 했으며 그 걷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과 인사를 했는지. 당시 어설펐던 나를 다독여주고 믿어주었던 선배님들과 동기 친구들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챙겨주지 못한 후배들 미안합니다. 경북대신문사의 번영과 성공을 멀리서나마 항상 응원합니다. 경북대신문 창간 70주년을 축하합니다.

- 서미경 영국 캠브리지대학 보건경제학자(95학번 학술부 기자)


"치열하게 보낸 청춘의 시간"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각은 편집국장이 마감해 달라고 했던 825일 오후입니다. 경북대신문 창간기념호에 글을 써 달라는 연락을 받고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하나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시간에 쫓기어 노트북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지금도 저는 매일 혹은 매주 일정 분량 이상의 글을 써서 넘기는 마감 노동의 대표주자인 신문기자 일을 10년째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 마감 노동의 커리어를 처음으로 시작했던 곳이 바로 경북대신문이었습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세상의 진실을 파헤치고 용기 있게 말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여서 꿈꿨던, 그리고 저 자신을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나마 비교우위에 있던 능력이 글쓰기 능력(절대 잘 쓴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이었기에 신문기자라는 직업을 꿈꿨었습니다. 대학 내 다양한 학생 활동 중에 경북대신문을 택한 건 기자라는 제 꿈을 이루기 위한 발판으로 삼고 싶었던 현실적인 이유가 컸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대학신문 기자는 대학생들이 학내에서 할 수 있는 활동 중 가장 힘든 활동 중 하나입니다. 학과 과방에서 선배들에게 저 경북대신문 지원했어요라고 말하면 선배들은 뭐 하러 그런 힘든 데를 들어가냐?”며 걱정했죠. “어차피 기자는 소위 인서울 대학애들만 뽑는다더라. 차라리 지금부터 다른 분야 취업 준비나 해라며 기를 죽이는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이게 취업 준비다라며 항변 아닌 항변을 했고, 그런 소리를 버티다 보니 지금은 기자의 꿈을 이루며 잘 먹고 잘살고 있습니다.

경북대신문에 입사 후 한 학기가 지나고 첫 명함이 나왔을 때 신나서 여기저기 돌리던 때의 묘한 짜릿함은 현직에 있는 지금에도 가끔 생각납니다. 북문에서 정문으로, 동문에서 서문으로 미친 듯 학교를 가로지르며 학생, 교수, 교직원 등 다양한 취재원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업이 비는 시간에는 한쪽 팔에는 전공 책을 끼고 양손에는 수첩과 펜을 들고 틈틈이 중앙도서관 앞과 학생서비스센터 주변을 배회하며 학생들의 멘트를 듣고, 수업이 시작되기 5분 전인 강의실을 들어가 쭈뼛거리며 설문지를 돌렸던 기억이 나네요. 월요일에는 기획 회의로 자정을 넘겨 집에 들어가는 게 일상이었고, 금요일은 복현회관 3층에서 하얗게 밤을 새우던 기억들도 이제는 추억입니다. 그렇게 경북대신문에 제 대학생활의 절반을 털어 넣었습니다.

기자라는 꿈을 품고 보냈던 경북대신문 3년은 제게 많은 것들을 남겼습니다. 먼저 기자라는 직업이 녹록지 않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매주 내가 무엇을 써야 하고 이것이 신문을 읽는 독자에게 어떤 의미로 작동할 것인지에 대해 계속 고민했던 것을 지금은 매일 하고 있습니다.

경북대신문 기자 활동을 통해서 사람도 많이 얻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MBTI로 보면 ‘I’ 성향인 제가 생판 모르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끌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3년 동안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니 점점 낯짝이 두꺼워지는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또 내가 만나는 학과의 사람들 이외의 다른 학과의 사람들을 폭넓게 만날 수 있었다는 것도 제 시야를 확 넓혀주는 계기가 됐죠. 그때 만난 당시의 취재원들은 지금도 간혹 연락하게 되고 지금 하는 일에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현실적인 것을 떠나 경북대신문에서 일하는 3년 동안 제가 얻었던 건 치열하게 보낸 청춘의 시간이었습니다. 내일모레 마흔이 되는 시점에서 그때처럼 남들 안 따라가며 나의 시간과 힘을 바쳐가면서 뭔가를 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 물어보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난 나의 길을 가겠어라며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며 뭔가를 만들어 내 본 경험은 그때밖에 할 수 없으니까요. 다시 한번 경북대신문의 창간 70주년을 축하드리고요, 앞으로도 치열한 학생 기자의 정신으로 경북대 구성원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어 주길 바랍니다.

-이화섭 매일신문 기자(03학번 대학부장)


"어떤 여름의 강렬한 장면"

매미 소리가 유달리 시끄럽던 2013년 여름, 다음 학기 기획을 준비하던 대학부 기자 넷이서 늘 쓰던 스트레이트 말고 내러티브 기사를 써보자며 머리를 맞댔다. 그때 난 2년 차 대학부 기자였는데, 새로운 것을 시도하자는 부장의 열의가 부담스러웠다. 학보사 구석의 뒤통수 뚱뚱한 컴퓨터 앞에 앉아 한 손으로 발가락을 긁으며 다른 한 손으론 머리를 쥐어뜯었다. 학보사 일은 설렁설렁하며 취업 준비에 아르바이트까지 챙기던 시기였다.

기획은 쓸 게 없어요’, ‘대학 안에 이야기가 없어요라는 불평에서 시작했다. 이야기가 있는 곳을 찾아가 보자는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4편의 기사가 나왔다. 기자들은 수의대 부속 동물병원, 동아리 가두모집, 복지관 지하상가, 취업 상담센터로 흩어져 죽치고 앉았다. 뻘쭘한 이틀이 지나자 공간과 내가 서로를 적응하기 시작했다. 사흘이 지나갈 때쯤, 먼저 말을 걸어 봤다. 일주일을 버티니 이야기가 들렸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기자들 사이의 오래된 진리를 몸으로 겪은 경험이었다. 공을 들인 만큼 취재원은 깊은 이야기를 풀었다. 동물병원에 취재하러 간 기자는 귀한 곰 발톱 깎기 관람권을 얻었고, 복지관 지하상가를 100번쯤 배회한 기자는 까칠한 상인들에게 주전부리를 얻어먹었다. 취업 상담센터로 3주 가까이 출퇴근한 나는 두 명의 취준생에게 지독하고도 절박한 현실을 듣고 기사에 옮겼다.

그 여름이 한 번씩 떠오른다. 문을 열기 전 머뭇거린 발걸음과 쭈뼛대다 말을 건 찰나의 순간, 밀고 나오는 불안을 애써 집어넣고 후배의 어깨를 두드린 손 같은 것. 학생기자라는 애매한 위치도, 졸업 뒤 다가올 불안한 미래도 지나고 보니 꼭 필요한 설정이었다. 덕분에 복현회관 3층에서 먹는 술은 늘 달았다.

무엇보다 3년간 함께 기사를 쓰고 답 없는 문제를 토론하며 때론 치고받고 싸운 동료들 덕분에 한 발짝씩 나아갈 수 있었다. ‘남는 건 사람이라는, 그 당시에도 통하지 않은 고어(古語)로 서로의 발목을 잡았던 부끄러운 순간들은 지금도 우리 사이의 뜨거운 술안주다. 여전히 학보사에 잡고 잡히는 순수함이 남아있는진 모르겠다.

이야기가 있는 경북대기획의 머리말에 대학부장 선배는 썼다. ‘화수분 같이 이야기를 뿜어내던 캠퍼스는 이제 옛말이 되었습니다. 스펙과 아르바이트로 인해 캠퍼스 공동체가 무너졌기 때문 아닐까요?’ 이 문구에 나의 10년 전 선배들도, 지금의 학보사 구성원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후배들에게 위로가 될진 모르겠지만 학보사는 우리 때에도 위기였다. 대체 전성기는 언제였던 건지. 선배들에게서 나 때는 기자 한 명이라도 신문을 냈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경북대신문이 위기인 채로 연명하는 게 아닌, 기자 개개인에게 어떤 여름의 강렬한 장면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정론·직필의 펜대나 대학 공론장의 역할 따위는 따라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

-김보현 뉴스민 기사(12학번 대학부장)




많은 선배를 거쳐 어느덧 경북대신문이 창간 70주년을 맞았다. 경북대신문 활동은 우리에게 많은 흔적을 남겼다. 취재하며 만난 사람은 인연이 되어 한 페이지를 함께 적어나가고 어느덧 한 권의 ‘청춘’이라는 책이 완성된다. 경북대신문은 우리에게 단순 지나가는 한순간이 아닌,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강렬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2022년 8월, 누군가는 여름방학을 즐기고 있을 시기, 경북대신문 기자들은 ‘학생기자’라는 이름 아래 오늘도 신문 사에 모여 회의하고 있다. 뜨거운 햇볕 아래, 직접 발로 뛰며 ‘젊음’의 또 다른 페이지를 장식한다. 경북대신문의 시계는 언제나 돌아가며, 앞으로도 힘찬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2022년 편집국 기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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