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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기획

대한민국을 지킨 호국의 상징, 가산산성

팔공산 여행 기획 ②

풍부한 자연경관과 불교문화의 중심지로 수많은 사찰을 품고 있는 팔공산 도립공원. 그리고 팔공산 갓바위에서 약 27km 떨어진 서쪽 끝자락, 영남에서 한양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가산에는 과거 사람들의 바람이 담긴 결과물이 자리하고 있다. 이번호에서는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칠곡 가산산성을 오르기위한 첫 시작, 진남문

▲가산산성 주차장에서 본 진남문 전경

칠곡 가산산성은 호국의 고장, 칠곡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유적이다. 가산산성에는 성을 지나는 총 6개의 문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진남문은 가산산성을 대표하는 문이다. 또한 가산산성을 오르기위해서는 꼭 지나야하는 문이기도 하다. 
진남문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본교 북문에서 706번 또는 719번을 타고 한 번의 환승을 한 후 ‘남창마을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도보로 30분가량을 더 가야 도착할 수 있다. 흔한 물 하나 챙기지 않고 카메라만 달랑 든 채 버스로 2시간가량을 이동해 도착한 가산산성은 주말 이틀 동안 진행하는 ‘가산산성 문화제’로 인해 활기찬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가산산성 주차장에서 바라본 진남문은 생각했던 것보다 큰 느낌이었다. 큰 돌로 튼튼하게 쌓아 올린 성벽 가운데 홍예문*이 열려있다. 진남문 위로는 누각이 있어 아름다움을 더해주며, 그 누각에는 영남 제일의 방호 시설이란 뜻의 영남제일관방(嶺南第一關防)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진남문 위 누각에 적힌 영남제일관방 현판

진남문을 지나 들어가면 가산바위로 갈 수 있는 두가지 길이 있다. 경사가 완만하고 성 안쪽을 따라 초보 등산객들도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길 하나와 성벽을 따라 걷는 가파른 길이다. 성벽을 따라 걸으며 가산산성을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기에 망설임 없이 두 번째 코스를 선택했다. 
*홍예문 : 무지개 모양으로 된 문

가산산성의 성벽을 따라 오르다.

▲진남문을 지나 왼쪽으로 보이는 성벽길

진남문을 지나자마자 왼쪽에 보이는 길을 따라 무작정 오르기 시작했다. 걷기 시작한지 채 30분도 되지않아 옛 사람들의 노력에 대단함을 느꼈다. 
가산산성은 1639년 9월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이 10만 여명을 동원해 만든 내성을 시작으로 영조 17년(1741)에 중성문을 설치하기까지 약 100여 년간에 걸쳐 완공됐다. 외성, 중성, 내성으로 이루어진 가산산성은 국내 유일의 삼중곽 형태를 갖추고 있다. 산성의 전체 둘레는 11.1km로 한양도성, 부산 금정산성, 북한산성, 남한산성 다음인 다섯 번째로 길며, 면적은 2.2㎢으로 면적만으로는 4번째로 큰 성에 손꼽힌다. 산성의 성벽을 따라 오르면서 산성을 만들기위해 아무런 도구없이 맨몸으로 큰 돌을 들고 올랐을 선조들의 수고를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만들어진 등산로가 아니다보니 큰 바위들과 울퉁불퉁한 산길을 계속해서 직면했다. 이는 지형적인 측면에서도 가산산성의 위치가 탁월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과거 조선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 양난을 겪으며 잇따른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한양으로 가는 영남대로의 길목 중 하나인 가산에 산성을 구축하게 된다. 암계류가 많고 골짜기와 능선의 지세가 좋은 가산은 산성을 축조하는 데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길을 따라 걷다보면 산성의 특징도 자세히 들어다볼 수 있다. 가산산성은 산 정상에서부터 계곡 아래까지 감싸 안은 포곡식과 산 정상부를 테로 두른 것 같은 테뫼식 축성법을 섞어 자연의 지형을 잘 이용해 돌로 쌓아 만든 성이다.

우리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던 역사의 현장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던 우리나라에는 약 1,200여개의 산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외침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산산성은 산성 축성 이후 외침이 없어 공성 전투를 치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가산산성은 6.25 한국전쟁 당시 마지막 보루로 낙동강을 지키는 치열한 격전지였던 ‘가산산성 전투’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1950년 8월 18일부터 27일까지 9일간 경상북도 칠곡군의 가산면과 동명면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북한의 남침을 가산산성에서 저지했다. 한국전쟁 당시 가산산성 전투에서는 상당량의 폭탄이 투하됐으며, 약 3만여 명의 북한군이 이 지역 일대에서 희생된 것으로 알려진다. 결과적으로 국군과 미군은 가산산성 전투에서 승리해 대구를 방어할 수 있었다. 
본래의 목적이 외침 대비인 만큼 성에는 싸움과 방어를 위한 다양한 장치가 존재한다.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 위에 쌓은 담장인 여장(女墻)이 1,887첩, 적이 알지 못하도록 성곽의 구석지고 깊숙한 곳에 위치한 8개의 암문과 네 곳의 포루*와 한군데의 장대*도 있다.

▲비밀리에 성을 드나들 수 있는 암문

1701년, 이 무렵 성안에는 절을 짓고 승려를 모집해 궁술을 연습시켰다. 봄과 가을에는 승장*(僧將)을 뽑는 제도가 있었으며, 이렇게 선발된 승장들이 지휘하는 승병들이 성 일부의 수비를 담당했다.
* 포루 : 성을 효과적으로 방비하기 위해 성벽을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쌓고 그 위에 대포를 쓸 수 있게 장치한 누각
* 장대 : 전투 시, 군사의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의 지휘소 
* 승장 : 승려로 이루어진 군대의 장수

팔공산의 정기를 받을 수 있는 가산바위

▲두 가지의 전설을 가진 가산바위

진남문 입구에서 2시간 30분가량을 걸어 도착한 곳. 가암이라고도 불리는 가산바위를 만날 수 있었다. 가산산성 서북쪽 성벽 사이에 위치한 가산바위의 상면은 270㎡ 규모의 큰 평면으로 되어있어 성인 100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바위이다. 바위에 올라가면 보이는 탁 트인 시야와 느껴지는 바람은 진남문에서부터의 3시간가량의 땀을 식혀준다. 특히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하늘에 떠 있는 것과 같은 기분도 느끼게 된다.
가산바위에는 두 가지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바위 윗면 동쪽 끝에는 지금은 메워져 있지만 과거 큰 구멍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신라시대의 고승이었던 도선대사가 전국을 유람하던 중 이 바위를 보고 가암의 지기(地氣)가 너무 세 이를 억누르기 위해 바위에 구멍을 뚫어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가산고을에 한 소문난 장사가 살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가산장사라고 불렀다. 어느 날 그 장사가 금강산 유람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가산에 이르러 쉬고 있었는데 금강산 유람 때 주운 조약돌 중 하나가 굴러 가산 아래로 떨어졌다. 그런데 그 조약돌이 사실은 작은 돌이 아니라 거대한 바위였으며 산성 밑에 떨어진 그 바위가 바로 지금의 가산바위라고 전해진다. 또한 가산바위 한 가운데 있는 커다란 구멍은 그 장사가 산성에 앉아 쉬면서 오줌을 누었고 그 줄기가 가산바위에 떨어져 뚫린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180년 동안의 삶의 터전을 느끼다
가산바위에서 잠시동안의 휴식을 취했으니, 이제는 산을 내려가야할 시간이 다가왔다. 신발끈을 고쳐매고 올라올때와는 다른 성 내부 동문을 지나는 길을 따라갔다. 성벽을 따라 갔을때는 전쟁의 시간을 살펴봤다면, 성 내부 길에서는 당시 성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가산산성 내에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을 보여주는 장소에는 대표적으로 3곳이 있다. 그 중 첫 번째로 마주한 곳은 관아터였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있는 칠곡도호부 관아터로 도호부*의 행정업무공간과 주거공간이었다. 관아터 위쪽으로는 식수원인 저수지가 2곳 있어, 이곳에서 물을 길어 농사를 지었다. 
두 번째로 본 곳은 산성마을터이다. 이곳은 민간인들의 주거공간으로 백성을 모아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 주고 성안에 살게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발굴된 자기와 숫돌, 기와등의 유물의 출토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내부 길을 내려오다 만나게된 동문 옆 성벽 길에는 수문터를 볼 수 있다. 칠곡 가산산성에는 6곳의 수문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동문 남서쪽 성벽에 설치돼있는 것이다. 수문터는 성 안팎으로 물을 통과시키는 장치로, 이 수문을 통과한 큰굼골의 물이 남문까지 흘러갔다. 현재는 수문 전체가 사라져 정확한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 고지도에 위치가 표시돼있다.

▲옛 사람들의 식수를 책임지던 수문터

지금은 전부 터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바쁜 걸음을 멈추고 해발 901m에서 생활했을 선조들의 모습을 상상해보 건 어떨까? 
* 도호부 : 조선시대 칠곡에 설치됐던 지방 행정제도


하채영 기자 citten23@knu.ac.kr
편집 전하연 기자 jhy21@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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