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막창의 역사는 도축장 중심으로 시작됐다. 1969년 4월 현재 성당못 옆 두류수영장 자리에서 도축 전문법인 ‘신흥산업’이 개업하고 1970년 시립도축장으로 발돋움하면서 막창구이 시대가 열린다. 1970년대 초부터 유행한 막창은 본래 소주와 궁합이 잘 맞는 안주거리였다. 그 의미에 맞게 신문사 선배와 술 한 잔 기울이려 막창 집을 향했다. 장소는 돼지막창과 곱창으로 유명한 안지랑 곱창골목으로 정했다. 원래 막창은 소의 네 번째 위인 홍창이지만 돼지의 창자 끝부분도 막창구이로 이용되어 소막창에 비해 더 기름진 맛과 덜 질긴 식감으로 인기를 끌었다.막창이 나오기 전 막창 맛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막장부터 맛을 봤다. 된장을 기본으로 하는 이 소스는 땅콩, 콩가루, 고춧가루 등 10여 가지 재료로 만들었다. 주인께 들어보니 막창 맛집마다 들러 맛을 보고 계속된 실험 끝에 만든 이 집만의 막장이었다. 적절한 짭잘함과 고소함은 기대감을 높혀주었다. 드디어 온 막창은 초벌구이를 한 상태였다. 토치로 빠르게 초벌구이를 하는 이유에 대해 주인은 “오래 굽게 되면 육즙이 사라져 토치로 빨리 익힌다”고 말했다. 막창은 참을성이 필요했다. 초벌을 했어도 불판에 바짝 익혀
▲ 차가운 백김치 위 복어불고기와 콩나물 한 점. 사과를 갈아 넣은 백김치의 달달함이 불고기의 매콤함과 어우러진다. 수성구에 있는 들안길은 식당 100여 곳이 모여 있는 식도락의 거리다. 학교에서 버스로 40분 쯤 달려 들안길에 도착하면 식당 곳곳에서 풍겨오는 군침 도는 냄새에 혀에 침이 고인다. 기자가 찾아간 곳은 ‘복어불고기’의 원조로 유명한 ‘미성 복어불고기’. 들안길이 번성하기 전부터 자리를 잡은 식당이다. 직원의 추천으로 밀복(복어의 일종) 불고기를 주문했다. 넓은 철판에 먹기 좋게 썬 복어와 새빨간 양념, 콩나물, 당면이 섞인 복어불고기의 겉모습은 아귀찜과 흡사하다. 여태껏 먹어본 복어 요리는 복어지리(맑은 탕 요리)밖에 없어 그 맛이 무척 기대됐다. 혀끝에 한 점 올렸다. 매콤하고 적당히 달착지근한 양념과 지방이 없어 탄력적인 복어살코기, 아삭아삭한 콩나물이 저절로 녹아내려 목구멍으로 사라졌다. 같이 먹던 친구와 서로를 놀란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특히 꼬리 부분이 별미다. 바다에서 헤엄치다 온 힘이 있는 건지, 발라먹기는 힘들지만 그만큼 쫀득하고 담백한 맛이 있다. 아무리 맛있어도 매운 것만 계속 먹으면 목
야끼우동, 이자카야에서 안주로 만날 것 같은 이 음식은 무려 40년 전부터 대구에 자리를 잡고 있다. 시작은 세 명의 중화 요리사들이었다. 1970년대에 중국 면 요리를 대구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새롭게 개발해낸 것이 현재 ‘대구 야끼우동’의 시초가 됐다. 원조 야끼우동 식당으로 유명한 곳은 두 군데가 있다. 동성로 중앙무대 인근 골목에 위치한 ‘중화반점’과 대구 근대역사관 맞은편 골목의 중식당 ‘공이사’다. 이 두 식당은 개발자인 세 요리사들 중 둘이 각각 운영한 식당들이다. 대구백화점 앞 동성로 중앙무대, 이곳에서 패스트푸드점 골목으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옛 느낌이 물씬 나는 ‘중화반점’의 간판이 보인다. 간판에도 ‘원조 야끼우동’이라고 적어놓았을 만큼 야끼우동을 찾아오는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면 테이블마다 야끼우동을 주문하지 않은 곳이 없다. 9,000원짜리 야끼우동 한 그릇을 주문한 뒤 옆 테이블을 슬쩍 보니, 그들의 테이블에도 어김없이 야끼우동이 올라와 있었다. 식사 중이던 손님들에게 맛이 어떻느냐고 말을 걸었다. 대부분이 호평 일색이었다. “불맛과 마늘맛이 강하게 나서 매우 맛있다”는 한 손님의 말과 같이,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조리서이자, 경북 안동의 장씨 부인이 저술했다고 알려진 ‘음식디미방'에는 술안주 조리법만 50가지가 나온다. 그만큼 경상도 지역에서는 술안주 요리가 발달했다. 술을 좋아하는 일명 ‘주당’들은 더 맛있는 안주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군분투 했고, 다양한 요리를 개발했다. 뭉티기도 그런 노력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김정자 대구시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전국적으로는 ‘육회’가 보편적으로 인기가 있지만, 대구에서 시작된 한우 생고기인 ‘뭉티기’는 여전히 지역민의 인기를 얻고 있다. 대구 향촌동에는 1960년대 초반부터 생고기 집이 생겨났다. ‘너구리’ 라는 식당을 시작으로 원조를 논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집들이 생겼다고 한다. 지금도 경상감영공원 정류장 근처에서는 줄지어 있는 생고기 집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생고기를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썰어 먹는다고 해서 뭉티기로 불렀다. 술안주인 뭉티기를 먹으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밥을 먹고 오는 건 물론이고, 비싼 가격을 감당할 마음도 가져와야 한다. 뭉티기의 가격은 100g의 경우 15,000원이다. 떨리는 입으로 중(300g)‘짜’를 달라고 하자, 간단히 요기를 할 수 있는 잔치국수부터, 족발, 양
해안에서 약 80km 떨어진 대구는 내륙지방이라는 특징 때문에 80년대 이전에는 신선도가 높은 해산물을 접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대구 사람들은 활어를 먹기보다는 해산물을 데쳐먹었다. 이 때문에 생겨난 음식 중 하나가 무침회이다. 1960년대 전후로 생겨난 무침회는 타 지역에 있는 회무침이 주재료를 활어로 하는 것과는 달리, 주로 오징어와 소라 그리고 논고둥 등의 해산물을 먹기 좋게 삶은 후 미나리나 무 등의 채소들에 양념을 더하여 무쳐낸 음식이다. 그렇다면 무침회만의 매력은 무엇인가. 대구 무침회 양념은 너무 달지도, 맵지도, 짜지도 않아 남녀노소가 좋아할 만하다. 무침회에 오징어 등의 해산물과 함께 들어가는 무는 다른 주재료들과 다른 식감이 있어 물리지 않고 계속 입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또한 양념이 무에 배어 육회에 들어가는 배처럼 달고 아삭아삭하다. 대구 서구 내당동에는 반고개무침회골목이 자리잡고 있다. 저녁 6시쯤 되면 골목 밖에서 온 사람들이 한두 명씩 식당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식당들이 북적북적해진다. 사람들이 식당에서 무침회를 먹는 모습을 보면 오늘 저녁 메뉴는 정해진 것이다. 식당에 들어가 14,000원의 무침회를 주문하면
동인동 찜갈비의 역사를 탄생시킨 ‘실비 찜갈비’ 박만수 사장의 아들 박문일 씨는 아버지의 성정이 매콤하고 화끈한 찜갈비처럼 불 같았다고 기억한다. 그는 온 몸이 땀범벅이 되면 정육점에 가서 갈비를 직접 사 들고 집으로 왔다. 그는 이 갈비를 분해해 가마솥에 푹 삶아낸 뒤 소금에 찍어먹다 속이 느끼해지면 마늘과 고추를 듬뿍 넣어 비벼 먹었다. 바로 이 화끈한 맛이 찜갈비의 시작이다. 이를 맛본 친구들은 대구에는 ‘요런’ 음식이 없다며 식당을 차리면 돈이 될 것 같다고 박 사장을 부추겼다. 그렇게 탄생한 ‘실비 찜갈비’는 현재의 동인동 골목에 위치했던 한 한옥집에 자리하게 된다. 당시 골목은 먼지가 폴폴 나는 비포장도로를 사이에 둔 주택가였고, 연탄불로 만들어낸 갈비에는 차 먼지가 묻어도 손님들은 맛있게 먹었다. 대구 중구청 인근에 자리한 중구 동인동 찜갈비 골목에 들어서면 바로 ‘실비 찜갈비’ 간판이 눈에 띈다. 주인 아주머니가 우릴 반갑게 맞았다. 메뉴판을 살펴보니 1인분 기준 미국산은 18,000원, 한우는 28,000원이었다. 이윽고 한 상 가득 차려진 찜갈비와 갖가지 밑반찬들에 군침이 싸악 돈다. 시식에 앞서 사진 촬영을 하느라 배고픔이 극에 달한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