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학전문학교는 1923년 설립된 대구자혜의원 부속 사립의학강습소(1년 후 도립으로 개편)를 모체로 1933년 설립된 공립전문학교이다. 해방 후 대구의과대학으로 그 역사가 이어졌으며 오늘날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이 된다. 대구자혜의원 부속 사립의학강습소는 1923년 7월 대구자혜의원 의관 요시다 준이치로(吉田準一郞)의 설립 청원에 대하여 경상북도지사 사와다 토오죠(澤田豊丈)가 응하여 설립된 것으로 공식 기록되어 있다. 일본인이 의학교육기관 설립을 주도하고 운영에 대거 참여하였지만, 한국인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우선 대구의학전문학교 설치를 위한 운동에 대구상업회의소를 중심으로 장직상(張稷相), 한익동(韓翼東), 서병조(徐丙朝), 이장우(李章雨) 등 한국인들을 포함한 지역 유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원 의학강습소 및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생들 중심으로 대구자혜의원, 이후 대구도립의원에 근무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더 높은 직급의 의관(醫官)보다 의원(醫員) 또는 조수(助手)의 자격으로 출발하였고 대체로 근무 기간도 짧았으나, 1913년부터 설치한 간호부조산부양성소, 이후 의학강습소 교육에도 관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최초로 대구자혜의
여기까지는 우리가 잘 아는 사범대학 이야기사범대학은 1923년 4월 「경상북도공립사범학교」로 출범했다. 1910년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일본은 조선에 사범학교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더 많은 일본인들을 교사로 초빙하기 시작했다. 삼일운동 후 높아지는 근대식 학교교육에 대한 열망은 이내 교사부족 현상을 불러왔다. 그 결과 1922년에 관립 경성사범학교를 필두로 1923년부터 각 지역마다 공립사범학교 설립이 허가되었고, 대구에도 1923년 4월 경상북도공립사범학교가 개교했다. 그리고 1929년, 조선총독부는 다시 사범학교 정책을 바꾸어 지역의 공립사범학교를 모두 없애기로 했다. 대신 관립학교였던 경성사범학교와 함께 평양과 대구에만 관립사범학교를 남겨두었다. 경상북도공립사범학교는 5년제 중등학교인 관립 대구사범학교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각 지역에 있던 사범학교들을 폐교시켰으니, 닥쳐올 교사부족 현상은 명약관화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다시 지역마다 관립사범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고, 해방 직전에 경성(1943년), 평양, 대구(1944년)의 사범학교는 다른 사범학교와 달리 오늘날 고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대구가 교육도시라는 이미지가 생긴 것도
본관 앞에는 우리 대학의 자랑거리인 야외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를 조성한 제4대 계철순 총장의 호를 따서 월파원(月坡園)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승탑 2기를 비롯하여 대구·경북 각지에서 수집한 불상, 석탑, 비석, 문인석, 주춧돌 등 백 수십 점의 석조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외 박물관의 하나인 이곳에는 크고 잘 생긴 삼층석탑 1기가 서 있다. 달성군 화원면 천내동 4구에서 옮겨온 전 인흥사지 삼층석탑이 그것이다. 인흥사의 창건 시기는 잘 알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관련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층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대략 신라말·고려초 무렵 창건된 사찰로 생각된다. 이곳을 인흥사지로 확정할 수 있다면, 우리 민족 최고의 고전인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1206-1289)이 머문 현장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명은 일연 입적 후 그의 문도들이 고려 충렬왕 21년(1295)에 세운 비석이다. 이에 따르면, 일연은 1264년 가을 서울에서 내려와 포항 오어사에 잠시 머물다가, 인홍사 주지 만회가 자리를 양보함에 따라 이곳에 주석하게 되었다. 이때 그를 따르는 학승들이 구름처럼 모여들
저수지(貯水池)의 분수탑기록관에서 현재의 “일청담” 모습과 전혀 다른 사진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1963년 3월 21일 발행 “경북대학보”(현재의 “경북대신문” 이하 “학보”로 표기) 1면에 물보라를 분출하고 있는 분수탑 사진과 “자유·정의·진리의 표상=분수탑”! 이라는 사진 설명도 찾아볼 수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사진 1) 재학시절 가끔 쳐다보던 “분수탑” 모습이었다. 지금의 일청담의 분수대는 5개 단과대학이 쏟아지는 물벼락을 맞고 있는 모습이다. 일청담은 경북대의 상징적 수경시설이다. 일청담 표지석에 일청 하영수(河泳洙) 씨의 찬조로 준공하였다고 음각되어 있다. 당시 “학보”에는 “일청담”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기사가 없다. 장기간에 걸친 공사 후, 하영수 씨의 찬조로 일청담을 만들었다는 표지석을 세운 것 같 같다. “학보” 기사(1962.6.14.)는, 지금의 일청담 위치에 이미 있던 웅덩이의 지하수(地下水)가 부족하여 실습용 논(테니스장 농구장 지역) 관리에 어려움이 있어서, 웅덩이를 더 깊이 파서, 경북대 모표(감꽃 첨성대) 형태의 저수지(貯水池)를 만들고 분수탑도 세운다고 하였다. 서울대는 분수탑을 설치한 적이 없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면학 분위
지금으로부터 49년 전인 1973년 10월 17일에 본교 국제교류의 시작인 뉴욕주립 버팔로대학교와의 자매결연식이 있었다.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학의 규모와 연구 인력이 늘어남에 따라 학술활동의 국제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이 시기 본교를 국제적인 대학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첫걸음이 뉴욕주립 버팔로대학교(Th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Buffalo)와의 자매결연(1973)이다. 그 시작과 과정, 성과는 이랬다. 당시 본교 김영희 총장은 1972년 8월 미국무성의 초청으로 미국 교육 문화 시찰차 방미, 그 기간 중에 뉴욕주립 버팔로대학을 방문하여 경북대학교와 버팔로대학교 간의 자매결연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귀국 후에도 이 일을 계속 추진하여 1973년 1월에 버팔로대학으로 공식적인 편지를 보내어 양교 간의 자매관계 수립의 가능성에 대한 의견을 타진하였다. 이에 대하여 버팔로대학은 1973년 2월 본교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본교는 그 실현을 위한 준비로, 양교(兩校) 자매결연 추진위원회를 대학원 내에 설치하여 그해 3월에 『교수의 교환, 연구자료의 교환, 협동연구, 연구기자재의 기증, 대학원생의 교환, 학생 간의
경북대학교는 2001년 9월에 ‘국제교류담당관’이라는 직제를 설립하여 재학생과 교직원의 국제교류에 관한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 후 국제교류원이라는 대학본부의 한 조직으로 운영되었으며, 국제교류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국제교류처로 변경돼 현재의 형태를 띠고 있다. 국제교류원이나 국제교류본부에서 국제처 혹은 국제교류처로 바꾸는 추세는 경북대학교뿐 아니라 상당수 국내 대학교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한국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한국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해외 학생들의 수요가 증가함을 나타내며, 예전에 국내 학생을 해외로 보내는 업무와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은 경북대학교 재학생이 국제화 역량을 왜 배양해야 하는가이다. 학생들은 4년이라는 길다면 길지만 짧은 시간 동안 본인이 희망하는 진로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므로 효율적인 시간 배분이 필요하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국제화 역량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가장 먼저 드러나는 부분은 토익(TOEIC) 점수로 대변되는 어학능력일 것이다. 10년, 20년 전과 비교하면 토익의 중요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겠지만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어학능력과 같은 국제화
바야흐로 3월!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세 번째 맞는 3월이다. 최근 몇 년 동안 3월의 캠퍼스를 감도는 활기찬 봄기운을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3월이 되면 괜스레 마음이 설렌다. 학부와 대학원 과정 등 세 번의 입학을 거치며 캠퍼스에 쏟았던 기쁨과 눈물들이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다가 해마다 3월이면 몸과 마음이 반응하는 것이리라. 세 번의 입학 중에서도 첫 번째 입학은 성인으로의 도약을 상징하는 통과의례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매년 3월에 경험하는 이러한 설렘도 30여 년 전 캠퍼스를 처음 밟았던 첫 입학과 직결된다. ▲입학식(1959) 학력고사로 대학을 진학했던 그때만 해도 지원 대학에 직접 방문하여 입학원서를 제출했고, 학력고사와 면접시험 또한 지원 대학에서 치렀다. 입학 전에 대학 캠퍼스를 여러 번 방문할 기회가 있었기에 대학 생활에 대한 기대는 컸고, 입학통지서를 받은 이후엔 더욱 설레는 마음으로 입학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대면한 3월의 캠퍼스! 몇 주간에 걸쳐 선배와의 대면식, 신입생 환영회 등이 열렸고, 그러는 사이 선배 동기들과 얼굴을 트고 대학 생활의 맛을 조금씩 알아갔다. ▲행정학과 합격통지서(1986) 개강하고
“캠퍼스에서는 신입생 환영회가 봄 한 계절을 술렁거리게 만든다.” 1978년 3월 캠퍼스. 학교신문(경북대학보 1978.3.20)은 그해 봄날을, 그리고 해마다 봄날을 이렇게 묘사한다. 몇 주일을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 학과 신입생 환영회, 동문 환영회 등 각종 환영회가 열리고, 환영회에는 으레 막걸리가 나오고 노래가 터져 나오고 교수님들이 달려와 어울린다고. 1978년만 아니라 매해 봄날은 그렇게 시작됐다. 입학식, 학교 오리엔테이션, 그리고 봄이 다 가도록 이어지는 환영회들. 온 봄날을 다해 격하게 환영해도 반가움은 줄지 않았다. ▲1955년 국문과 신입생 환영회 1955년 신입생 환영회 사진 두 장. 하나는 국문과 신입생 환영회, 다른 하나는 출처를 알 수 없다. 이 해 신입생들은 1,085명 모집에 지원자가 4천 9백 명으로 평균 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에 성공했다. 국문과도 25명 모집에 133명이 지원했다.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전쟁은 불안하지만 휴전하였고, 경북대학교도 국립종합대학으로 개교한 지 4년째 접어들던 해이다. 국문과 학생들이 환히 웃으며 강강술래 하듯 모두 어깨를 겯고 원을 만들어 돌고 있는 사진. 1955년 입학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