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인간이 공익과 최소한 타협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 중에서도 가장 입문하기 쉬운 것은 바로산책이다. 그저 사는 아파트 근처를 맴도는 것뿐이지만 루쉰의 작품 <고향>의 마지막 문장인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길이 되는 것이다’ 에서 알 수 있듯, 본래부터 길이라고 정해진 길은 없다. 그저 수많은일상의 용도로 트인 모든 공간이 어떤 의도를 품은 발과 맞닿을 때 비로소 그 의도대로의 길이 되는 것이기에, 나는 산책을 하기로 했다. 코로나 시대의 첫 여름을 떠올려 보니, 나는 많이도 걸었고, 또 참 많은 것들을 봤다. 이를테면 충영으로 뒤덮인 앵두나무 잎. 그 얼룩덜룩한흔적과 뒤틀린 모양은 어느 이름 모를 곤충이 기생하여 생긴 흉터이다.이들은 온전해 보이진 않지만 아주 시들지도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보지않고서는 그 아픔을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게 태연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이것을 보고 생각했다. 초록색인 그대로 시들어가는 것들도 있구나.아직 젊고 어린 학생들 또한 코로나라는 전례 없는 비상 상황에서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흉이 있다곤 하지만 시들었다기엔 아직 너무 푸른 잎처럼,
어렸을 적 초등학교 영어 교과서에, ‘지토’라는 초록색 외계인이 나왔다. 지토는 집에 누워서 화면을 보며 수업을 듣고, 의사를 만나지 않고 진료를 받았다. 초등학생의 나에게 지토의 이야기는 공상영화였다. 그런데 2020년, 나는 지토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변화가 그렇듯이 처음의 나는 지토처럼 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대단한 과학 기술이구나 했는데 대단한 것은 지토였다.이 새로운 일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고 성급하게 일어났다. 이전에도 친구와 영상통화를 하고, 인터넷 강의를 듣기도 했지만 그것은 필요의 영역이었지, 필수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제는 화면으로 접하는 일상이 당연해졌다. 먼저,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전환되었다. 교수님이 화면에 쓰는 글씨만을 보고, 목소리를 듣기만 하는 것은 버텨야 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위에는 생활복을, 밑에는 잠옷을 입고 있는 나의 모습은 내가 하는 것의 구분을 모호하게 했다. 내가 하는 것이 집에서 쉬는 것인가? 공부를 하는 것인가? 강의실에서 받은 가르침은 전공과목의 내용뿐만 아니라, 같이 공부하는 학우들의 움직임, 책 넘기는 소리, 교수님의 표정, 누군가의 질문, 교수님의 설명으로 완성되는 하나의
‘수능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경북대학교였다.’소설 <설국>(雪國)의 주인공이 눈으로 뒤덮인 니가타현을 바라보며 느꼈던 감정처럼, 2015년 경북대학교에 처음 발을 내디딘 나의 심정을 표현하자면 위와 같았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 동안 학교에서 공부를 해왔지만 대학교에서 배우는 학문은 확실히 달랐다. 어렵지만 유익한 전공수업을 들으며 전문성을 쌓았고, 관심 있는 분야의 교양수업을 찾아 들으며 정말로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친구, 선후배들과 함께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으며 캠퍼스를 거닐었다. 그러나 마지막 학년인 4학년 과정을 앞두었을 때 초유의 전염병인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덮쳤고, 남은 대학생활은 완전히 바뀌었다. 수업은 비대면 원격 강의로 전환되었으며, 텅 빈 강의실은 하염없이 학생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나름 디지털 기기에 친숙하다는 Y세대의 일원이었지만, 화상 프로그램을 통한 실시간 수업은 낯설기만 했다. 이는 교수님들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원활하지 않은네트워크 환경까지 더해지니 강의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아예 수업을 포기하고 학습자료와 과제로 수업을 대체하는 교수님들도 계셨다. 이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