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국내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새로운 희곡 <심판>이 출판됐다. 사람들이 죽은 후에 가는 사후세계에서 충실하게 살았는지 심판받게 된다는 이 희곡은 과연 충실하게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또한 심판을 통해 진행되는 이야기 과정은 우리가 실제로 심판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들며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러면 <심판>에 나오는 대사들을 통해서 충실한 삶이란 무엇인지 한 번 알아보자. 당신은 당신의 재능을 어떻게 썼죠? 전혀 쓰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형... 아니, 다시 말해 삶의 형을 구형합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을 꿈꿀 것이다. 직업적인 성공, 금전적인 성공, 명예적인 성공 등등. 여기, 우리 기준에서 충분히 성공적인 삶을 산 ‘아나톨 피숑’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피숑은 자신을 <좋은 학생, 좋은 시민, 좋은 남편, 아내에게 충실했고, 좋은 가장, 좋은 가톨릭 신자, 좋은 직업인>으로 멋지게 살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사후세계의 심판에서 최고의 형벌을 선고받는다. 검사는 피숑의 평가에 대해 왜 좋은 인생이 아니었는지 죄목을 낱낱이 밝힌다
▲솔라이브는 작년 11월에 개최된 <2020 연합(공동) 창업캠프; 경북대·계명대·금오공대·안동대가 하나 되는 ONE CAMP>에 참가해 창업아이디어경진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SOL.I'VE(솔라이브)’는 지난 2013년에 설립된 본교 중앙동아리로 창업에 관심 있는 다양한 학과의 학생들이 모여 창업에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스스로 쌓아 나가는 대학생 중심의 창업연구회이다. 솔라이브는 창업에 필요한 기반 지식 및 실무와 관련된 정보들을 주제로 교육 세미나를 개최해 기업가 정신을 갖춘 참된 기업가를 배출하기 위한 창업교육을 진행하고 있다.솔라이브는 소규모 비즈니스 모델을 직접 기획부터 실행, 운영해 창업과정을 경험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제작해 진행한다. 특히, 회원들이 소규모 비즈니스 모델을 실행하도록 도와주고, 더불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직접 현실화하는 방안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실현하고 있다.동아리의 주요 활동은 크게 ▲S.M.V(Solive Mini-Venture) ▲S.E.S(Solive Education Seminar) ▲S.S.C(Solive Startup Conference) ▲S.W(Solive Workshop)로 나뉜다.S.M
경북대신문에 기자로서 이름이 실리기 시작한 첫 호인 1627호의 발행일은 5월 6일이었다. 아직도 그날이 기억에 남는다. 오늘은 마지막 호인 1648호를 마무리 하고 있는 중이다. 모든 일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일은 끝마무리를 잘해야 진짜 잘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난 지금 경북대신문 국장으로서 마지막을 앞두고 있다.19학번 신입생으로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경북대신문이라는 조직에 들어온 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경북대신문에서 일을 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사회생활과 조직생활을 미리 경험한 것은 인생의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을 쌓은 것이다. 처음에 들어와서 일을 배울 때는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참고 견디면서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했다. 힘든 일에 지쳐서 경북대신문을 나가는 동기들을 보면서 나 또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다고 하면 거짓말 일 것이다. 수없이 흔들리고 또 흔들렸지만 그 마음을 바로 잡은 이유는 나까지도 나간다면 남는 사람이 너무 힘들어질까봐 차마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버티고 더 악바리처럼 버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같이 일했던 동기들은…
고등학생 시절, 선생님들은 늘 ‘대학교 1학년’이라는 단어에 낭만을 심어주었다. 화사한 꽃이 핀 캠퍼스, 연인과 손을 잡고 걷는 백양로, IT 도서관에서의 밤샘 공부와 센트럴 파크에서의 돗자리 술. 경북대학교에 입학하기로 한 내가 1월에 바랐던 것들이다. 3월이 됐고, 개학은 2주나 미뤄졌다. 4년을 함께할 동기들과의 첫 모임은 실시간 수업이었고, 자취방은 구했지만 기말시험을 칠 때까지 갈 일이 없었다. 그렇게 유난히 더웠던 이번 여름이 지나갔고, 1학기와 비슷했던 2학기도 어느새 다 흘러갔다.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20학번들은 여전히 학교가 낯설 것이다. 설렘과 떨림으로 가득 찼어야 할 신입생 시절은, ‘언제쯤 학교에 갈 수 있을까’라는 고민과 방 안에서의 끝없는 고독으로 가득 찼다. 새내기 새로 배움터와 학과 MT, 동아리 가두모집과 대동제는 유튜브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했고, 값진 경험이 담긴 조언을 해줄 선배들은 인터넷으로밖에 볼 일이 없었다. 아직 경상대학이 어디에 있는지, 테크노 문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벌써 1년이 지나갔다.한 해를 다 보내고 아쉬운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는 비단 나만의 아쉬움이 아니라 작년을 살았던 모두의 아쉬움일 것이다. 더
유시민 이사장과 윤희숙 의원이 헨리 조지(Henry George)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두 사람 모두 맞는 말을 했으나 그의 사상의 일부만을 얘기했다. 헨리 조지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진보와 빈곤』을 읽어야 한다. 이 책은 1879년에 출간되었지만 저자의 통찰이 뛰어나서 21세기 우리나라의 현실을 잘 설명한다. 다만, 이 책을 의도적으로 오독(誤讀)하고 저자의 사상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전을 잘못 해석해서 사이비종교가 나타나듯이, 이 책을 오독하면 헨리 조지는 선동가 내지 몽상가가 된다. 내가 이해한 헨리 조지는 상식적이고 직관적이며 친(親)시장적인 사람이다.헨리 조지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는 그를 사회주의자로 보는 것이다. 헨리 조지 사상의 바탕은 노동가치설이다. 임금은 자본에서 나오지 않으므로 자본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노동은 생산하는 즉시 자신의 몫을 가져간다. 여기까지는 마르크스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헨리 조지는 노동과 자본이 적대적이지 않다고 했다. 노동과 자본에게는 지주(地主)라는 공동의 적이 있다. 이 지점에서 헨리 조지는 마르크스와 결별한다. 생산물 중에서 지대를 제외한 나머지가 노동과 자본의 몫이다. 지주의 몫인 지대(地代)가
스마트 기기의 보급 확대와 함께 유튜브로 대표되는 비디오 기반 플랫폼의 발전으로 인하여 1인 방송 또는 1인 언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이와 관련하여 가짜뉴스 등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다. 사실 1인 언론이라는 표현의 적절성에 대해서는 많은 다툼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언론과 1인 언론을 비교하였을 경우 정확한 취재 및 정보전달 과정이나 정보의 신빙성 등에 있어서 1인 언론은 당연히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1인 언론 역시 일반적인 언론과 비슷하게 정보전달을 그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언론이라고 칭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은 헌법 제21조에서 언론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있고, 이러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언론에 대한 허가나 검열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다만 언론은 타인의 명예나 권리 등을 침해할 수 없고, 침해한 경우에는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을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주된 이유는 대의 민주주의의 형태에서 민의(民意)를 국가 정책 및 국회의 입법 등에 반영될 수 있도록 여론 형성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론의 주된 역할은 건전한 여론이…
귀면와란 괴수의 얼굴을 돋을새김 형태로 표현한 기와로 ‘도깨비기와’라고도 하며, 얼굴 모습이 용의 얼굴을 앞에서 본 모습이므로 ‘용면와’라고도 한다.통일신라시대 귀면와는 안면이 크게 표현되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강한 양감으로 가득 찬 점이 특징이다. 표현방식에 있어서는 거의 모두 큰 뿔을 가지며, 녹유를 사용한 예도 상당수 확인되고 있다. 이 기와의 제작시대는 통일신라의 이른 시기이다. 아래 부분이 반원형의 홈으로 파인 것은 기왓등에 얹기 위한 것이다.귀면와는 벽사(辟邪)의 목적으로 제작됐을 것으
우리는 겸손한 태도가 중요하다고 자주 듣는다. 특히 유교 문화가 일반적으로 퍼져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런 경향이 크다. 겸손함이란,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하고 자신을 낮춤으로써 역으로 자신을 높일 수 있는 좋은 자세나 행동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지나치면 좋지 않다. 요즘은 삶을 살면서 항상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기계적으로 겸손해 하는 이들도 많다. 물론 겸손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좋고 바람직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겸손한 자세가 무조건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겸손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여러 종교나 사회에서 이상적인 태도나 모습으로 그렸다. 서양의 기독교에서도 겸손은 좋은 자세로 여겨졌고, 동양의 유교에서도 겸손은 바람직한 자세로 여겨진다. 그렇기에 때론 너무 기계적이고 주입적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겸손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런 교육을 받은 탓인지 가끔 우리는 겸손이 지나쳐서 자신감이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지 못할 때도 있다.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운이 좋은 경우 굳이 자신이 말하거나 드러내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가치를 인정해주고 알아주는 경우